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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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시] 산책 산책 아파트 단지와 개천 사이로 난 길이 있다 초입에 작달막한 기둥 두 개 차들을 막고 서 있다 길은 4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고 거기서만 차들이 쌩쌩 달릴 수 있다 금지된 것은 생명을 보살핀다 개천에는 아주 가끔 오리들이 헤엄치지만 대개는 말라 있다 전신주 아래 누군가 전염병을 막는 일회용 마스크를 벗어 놓았다 방범용 CCTV 카메라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손톱달은 부끄러워하고 만월은 불길하다 이 길은 몇 번이나 아내와 걸었다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혼자 걷고 있다 저녁 먹은 것이 가슴부터 목까지 차오르고 비튼다 이러다 죽겠다 죄를 고백하고 양심을 토해놓고 싶다 봄인데 날씨는 쓸쓸하다 숨차게 뛰어보려다 그만둔다 패딩 점퍼에 손을 깊이 찌르고 후드를 덮어 쓴다 몇 분 뒤 몸이 가렵고 돌.. 2020. 6. 12.
[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창조의 복부> 창조의 복부 복부가 커지고 있다. 사리함의 진흙도 없이 빛들이 성장한다, 구른다 단련한다. 불타오르는 복부. 물질 중에선 오직 빛만이 불의 물질. 인간이 서서히 태어난다. 한 점, 한 점만으로. 은하수의 본원, 형체 있는 별들이 계승된다. 형체 갖춘 것들이 형상을 요구한다, 얻는다, 내보인다, 노래부른다. 인간은 단지 심심풀이로 내던져진 한 움큼의 빛 세포. 이토록 투명한 복부. 거기에는 눈, 입, 발, 장미가 스며 나오고 맑은 향기 소리,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그 복부, 행복한 사리함이 밤에 순회하며 하늘, 수세기를 거슬러 지나간다. 오, 거의 영원한 인간다운 달, 근원, 무덤과 성배를 흐르는 달. 넌 항상 가장자리까지!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898-1984) 【산책】 빛이 부풀어 오르.. 2020. 6. 12.
노발리스 <푸른 꽃> 푸른 꽃은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는 그리움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불태워줄 연인이 푸른 꽃으로 꿈속에 피어날 것입니다. 회사 일에 지친 직장인들은 못 다 이룬 젊은 날의 파릇한 꿈이 푸른 꽃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빚에 쫓겨 허덕이는 사람은 1등 번호를 담은 로또 한 장이 가슴속에서 꺾을 수 없는 푸른 꽃으로 피어있을지 모릅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노발리스의 가슴속에 푸른 꽃으로 핀 것을 무엇일지,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재미난 추리소설도 아니고, 흥미있는 스토리가 펼쳐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것도 아닌데, 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읽는 이의 마음에도 안개 속 희망처럼 피어있는 그리움의 푸른 꽃 때문입니다. 관념론으로 가득한 독일 지성의 .. 2020. 6. 1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10절) 이 구절은 산상수훈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의 두 구절은 이 구절의 설명 구절에 해당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11~12절) ‘의를 위하여 .. 2020. 6. 11.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장벽을 쌓고 나서> 장벽을 쌓고 나서 사람들과의 장벽을 쌓고 나서 나는 나 자신과의 장벽을 쌓고 싶어졌다. 그것은 손도끼로 깎아낸 나무 울타리는 아니다. 여기서 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거울이었다. 나는 두루 바라본다 ― 침울한 생김새를, 뻣뻣한 머리털을, 턱 위의 군살들을 어쩌면 이혼한 부부의 삼면경(三面鏡)이 가장 좋은 장벽일지 모르지 창문에 비친 황혼이 커다란 찌르레기가 사는 경작지와 담벽에 뚫린 파열구 같은 호수 ― 톱니모양의 전나무로 둘러싸인 호수가 그 속으로 기어든다. 조심해라, 호수의 뚫린 구멍으로부터 그 어떤 웅덩이를 거쳐 외부세계가 이곳으로 기어들지도 모르니. 아니면 그 외부세계는 밖으로 기어나갈 것이다.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6년 作 【산책】 산책은 봄이나 가을에 하기 좋다. 깊은 가을밤의 산책이 .. 2020. 6. 11.
[창작 시] 뼈에 대한 명상 뼈에 대한 명상 마트에서 싼값에 냉동 갈치를 샀다 구워보니 살이 너무 얇아 프라이팬에 들어붙어 먹을 수 없다 뼈를 다 발라놓은 종잇장 같은 갈치 조림으로 상에 올려도 무보다 살이 없다 역시, 생선엔 뼈가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에 뼈가 들어 있다 날렵하게 휘는 뱀의 몸뚱어리에도 새들의 날개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 공룡 화석에도 세월의 뼈가 찍혀 있고 고고학은 뼈에서 비롯되었다 뼈는 인류의 역사를 말한다 등뼈를 곧추 세우면서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헤겔은 말했다. 정신에 뼈가 있다. 아, 말에도 뼈가 있다! 독이 되고, 가시로 박힌다 생선을 놓고 논쟁하는 저녁식사 녹슬고 부러진 칼이 올라와 아내의 가슴을 베고 남편의 배를 가른다 피가 낭자한 식탁 이제야, 이 집 부부가 사는 맛이 우러나고 있다. 2020. 6. 10.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로서 단순히 화평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화평’은 개인적인 평안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화평을 만들어가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엇이.. 2020. 6. 10.
[명시 산책] 고트브리트 벤 <시> 시 일찍이 신성이, 깊고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어떤 피조물 속에서 부활해 말했던 바, 그것이 곧 시이지, 왜냐하면 그 속에는 무한히 마음의 고통이 누그러져 있기 때문이지. 마음은 이미 아득한 흐름 속에 헤매인 지 오래이지만, 시절詩節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민족들의 싸움을 뛰어넘고 권력과 살인 동맹보다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지. 한 조그마한 종족, 이미 오래 전에 백인의 탐욕에 의해 정복당한 인디안들, 아즈텍 말을 쓰는 야스키 족들이 부른 노래들도 조용한 농요農謠로서 줄기차게 살아 있지 : 행로를 안으로 갈앉혀, 정신에 멍에를 씌우고 있는 자의 그 위대한 중얼거림, 들이쉬는 호흡, 내쉬는 호흡, 멈추는 호흡 ― 인도 고행승과 탁발승의 호흡의 종류―, 침묵에 몰두하는 누구나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그 위대.. 2020. 6. 10.
[창작 시] 지천명 지천명 젊을 때 나는 일상의 한복판에 뛰어든 신화의 시간을 살았네 사치와 향락과 게으름과 몽상의 나날들이었네 요즈음 나는 죽음과 일상이 겹치는 나날을 살고 있네 병듦과 나이듦, 욕망이 소멸하는 시간 깊은 후회와 한숨의 아침저녁 뒤돌아보거나 반성 따위는 없었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은 자유로웠네 내 나이 쉰 둘 회개와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칼집에 꽂힌 칼처럼 고요한 생활, 질서의 반복 청춘은 교만했으나 백발은 고개를 숙이네 신께서는 장래 일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오늘은 미래보다 강하네 슬픔보다 더 아픈 평화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려나 보네 2020.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