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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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브린니 2020. 6. 10.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로서 단순히 화평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화평’은 개인적인 평안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화평을 만들어가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엇이든 만들어가는 일은 노력과 시간과 의지를 필요로 하는데,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가다니요. 화평을 만들어가는 일이 가능할까요?

 

내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화평이라면 세상이 이렇게 불안하고 복잡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만든다는 것은 도달하기 어려운 어딘가를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완벽하게 화평을 실현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화평 역시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기 위하여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합니다. 이 대가를 치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팔복의 말씀을 살펴보며 정리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공동상속자로서 ‘아들’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고 의를 사랑하며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화평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러한 성품이 바로 자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신학자 Broadus는 말합니다.

 

팔복의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결국 우리가 도달한 곳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지는 삶이 바로 팔복의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고통을 준 자와 화평하려면 내가 그 억울하고 미운 마음을 이기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관점이 달라 서로가 잘못하고 있다고 믿는 정치적 반대파들이 화평하려면 귀를 열어 상대방의 논리를 무조건적으로 반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평은 내가 고난을 받음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이루어집니다. 내가 내 생각을 고집하고 내 감정 상한 것에 몰입하여 상대방을 생각하지 못하면 결코 화평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때로 이렇게 이루어진 화평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은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부모 세대가 얼마나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통을 견디며 이루는 화평은 위선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으며 이루는 화평이어야 진정한 화평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완벽한 화평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런 화평은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현재 죄로 인해 타락하여 고통과 신음이 난무한 이곳에서 화평을 이루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대속의 붉은 피가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세대는 이 대속의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타인과 함께하면서 화평을 이루고 사는 삶이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요즘엔 그냥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1인 가정이 늘어납니다.

 

무엇이 위선일까요? 각자 혼자 살면서 가끔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모습만 보이고,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멋진 모습만 SNS에 올리고, 가급적 고통 받을 일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위선인가요, 아니면 고통을 견디면서 화평을 이루어가며 자녀에게 안정적인 가정을 선물하는 것이 위선인가요?

 

80년대생 이후의 젊은이들은 완전무결함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구질구질하고 께름칙하고 눈치 봐야 하는 일들을 혐오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치없이 칼퇴근하고, 아부할 필요없는 공무원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지저분한 그림자가 없는 무결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화평을 이루기 위한 대가까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무엇과의 화평도 좋습니다.

 

자연과의 화평을 위해서 재활용 쓰레기 분리를 잘하고,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쓰고, 가능하면 전기차를 사용하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도 화평을 위한 대가입니다.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치적 시위나 온라인 토론을 하는 것 역시 화평을 위한 대가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 아름다운 화평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과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배우자와 자녀를 위해 자신의 삶의 일부를 헌신하는 삶은 아름다운 화평의 대가입니다.

 

가방에 아이를 넣어 죽게 만든 계모 사건으로 나라 안이 떠들썩합니다. 이혼과 재혼이 흔한 일이 된 지금, 화평을 위한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화평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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