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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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by 브린니 2020. 6. 13.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소금은 고대 종교의식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언약과 연관된 의미를 지녔습니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도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들어 제자들에게 소금처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시대에 소금은 무엇보다도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소금, 즉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로서, 고기에 약간만 뿌려두어도 부패를 상당히 늦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 사용되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대 등에서 추출된 것이었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불순물이 많은 이 소금을 용해시키면 진짜 소금은 쉽게 녹아 희석되어 나오고, 남은 나머지 소금은 거의 쓸모가 없기 때문에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소금 때문에 흙이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지붕은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버려진 소금은 사람들에게 계속 밟히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짜 소금이 되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덕이 무너지거나, 도덕 자체를 억압으로 여기거나, 기준 자체를 다양하게 하여 윤리적 당위성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하라고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축복과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이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 사람, 불순물로 가득하여 지붕 위에 버려진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사람들에게 눈길이 더 갑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이 땅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 불순물로 취급되어 버려진 것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정말 버려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기는 합니다만, 삶 속에서 마치 버려진 것처럼 실패한 인생이라고 치부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때는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순간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인생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그들이 지붕의 흙 위에 버려져 밟힐 때, 그 흙이 더 단단해져서 구멍이 생기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매우 가슴에 다가옵니다.

 

그들을 밟으면서 사람들은 조롱하거나 무시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되지 않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안도하거나, 저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 보호받음에 대해서 감사하거나,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행동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밟히면서 구멍을 메우는 버려진 소금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슬피 울며 회개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밟혔고, 내일도 또 밟힐 것을 알면서 잠자리에 드는 비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회개가 하늘에 닿을까 싶을 만큼 비참한, 버려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을 위하여 슬피 울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한 랍비는 버려진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그것은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소금을 다시 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슈바이처(Schweizer)는 이 랍비의 말은 예수님 말씀의 요점을 놓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요점은 현재적으로 천국의 규범을 따라 살라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회적으로 버려지고 다시는 짠 맛을 낼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구약적인 이해방식일 수 있습니다.

 

간음하던 여인과 폭리를 취하던 세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현재적인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예수님의 성품과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은 버려진 소금과 같아 밟히는 삶을 사는 너희들이 이제 짠 소금과 같이 짠 소금의 규범으로 짠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라는 말씀이기에, 죽었던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부활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버려져 밟히는 것과 같은 비참한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니야, 너는 버려진 소금이 아니야. 너는 짠 소금이야.”라고 말씀하시는 위로의 소리이며, 소망의 소리입니다.

 

그리하여 이 소리를 들으면서 주변을 둘러봅니다. 내게서 짠 맛을 원하는 것들이 손짓을 합니다. 여리고 작은 소자가 내게 물을 달라 하고, 먼지에 뒤덮인 일상이 내게 목욕시켜 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들과 며칠 묵혀 놓은 일들이 손짓을 하면서 내게 짠맛을 달라고 하고, 멀리서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한 마디 소식의 짠맛을 달라고 손짓을 하는 게 보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없던 짠맛을 다시 우러나게 하는 이 한 마디의 말씀을 소망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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