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제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살라는 직접 명령이기도 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란 고대 이스라엘 마을을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하기 때문에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 눈에 띄며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밤에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불을 켜면 그 불빛이 주변 지역을 비추게 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에서 ‘말’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약 8.25리터 정도 되는 양을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Tholuck은 등불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하려고 이 ‘말’로 등불을 덮어두면 얼마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등경’은 등불 받침대로 방 하나에 한 개씩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등경은 빛을 멀리 비추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말로 덮어둘 때도 있지만, 정상적인 등불의 쓰임은 등경 위에서 방 전체를 환히 비추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때로는 위험을 피하실 때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명은 근본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는 데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등불의 근본 쓰임처럼 우리도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말이 아니라 ‘착한 행실’로 인함입니다. 어느 틈엔가 우리의 신앙생활은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공부도 언어로 채워져 있고, 설교도 말로 하는 것이며, 찬양도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전도도 말로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착한 행실’이라고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교, 봉사, 전도 등 선한 일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우선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등경은 먼저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빛이 비추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쓰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애쓰면서 칭찬을 받을지 몰라도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자녀의 불평을 듣는다면, 착한 행실의 방향이 잘못된 게 아닌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 묵상 공부를 오래 하여 묵상 모임의 리더로서 일하고,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 많은 사역을 하는 권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의 발목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더니,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더러운 눈물 치워.”
교회에서 칭찬받는 일꾼이 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런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한 행실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먼저 그 착한 행실을 집 안 모든 사람에게 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요.
자녀가 부모의 간절한 기도의 눈물을 “더러운 눈물”이라고 말했다면, 자녀와의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 문제의 근원은 자녀의 욕구와 부모의 바람에서 어긋남이 있거나, 부모의 모습에서 위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가림막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고 있거나, 착한 행실의 대가로 세상적인 큰 축복을 기대하고 있거나, 착한 행실의 대가로 자녀의 대학 입시가 대박나기를 바라는 등의 속마음을 우리는 가까운 가족에게 기가 막히게 들키게 됩니다.
어쩌면 착한 행실의 대가는 더한 착한 행실, 즉 더 큰 희생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가장 착한 행실을 하신 예수님이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어린 양이 되신 것처럼, 감당할 만한 큰 그릇에게는 더욱 큰 은혜가 부어져 더 큰 희생을 감당케 하실지도 모릅니다.
한 신실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아직 굶는 은혜까지는 없었습니다.”
굶는 것까지도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신실함이야말로 진짜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는 자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바울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은 가장 힘든 착한 행실까지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흔히 세상적으로 자신있게 꿈을 이루자는 의미로 이 구절을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만 말입니다.
착한 행실이 먼저 내 옆에 있는 배우자와 자녀에게 진짜 착한 행실이 되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으로도 그 빛이 뻗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착한 행실이라고 드러날 수 있는 외부적 착한 행실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부터 착한 행실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비추겠다고 외부로 떠도는 착한 행실은 정작 자신의 작은 집 안조차 비추지 못하는 위선이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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