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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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브린니 2020. 6. 1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10절)

 

이 구절은 산상수훈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의 두 구절은 이 구절의 설명 구절에 해당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11~12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말씀은 우선은 아무 잘못 없이, 까닭 없이 핍박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고통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함으로 고통 당하는 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애쓰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고통을 받는 것 등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팔복의 설교가 끝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한 팔복은 마지막에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이 비단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이미 너희에게 천국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셨듯이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 즉 이미 왔지만 아직 안 온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의를 위하여 자신이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 처한 사람들은 어쩌면 고난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받는 고통이 의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라도 붙들지 않으면 수치와 모욕의 시간을 견디기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박해의 시간이 정말 의를 위한 것인지는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우선은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는 한기총의 예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각과 노력이 있기에 구속되는 두려움과 교회가 지탄받을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도 보수 세력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구속되어 철창 안에 갇혀서 나름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집합 예배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일 때 보수적인 교회들은 예배 탄압이라고 소리를 높여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역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집니다. 그 신념이 다 같을 수는 없기에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 신념이 강하다고 해서 다 의를 향한 신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행하는 바가 정말 의를 위한 것인지 늘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것은 아닌지, 내 개인의 삶의 경험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친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의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통로가 없기 때문에 그냥 그 길에 우물쭈물 서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의를 위하다가 받는 고난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받게 된 고난은 아닌지......

 

그러면서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그 고난이 의를 위한 고난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성찰은 우리에게 더한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사실 따져보면 진짜 불순물 없는, 의를 위한 핍박은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개인의 삶의 경험이 섞이지 않는 신념이란 없으며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는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기에 조금은 편파적이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념을 지키는 자의 자긍심은 쉽게 오만의 난간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자긍심이 자만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또한 인간의 자기합리화는, 용기가 없어서 다른 길을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고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오히려 스스로 용기있게 고난을 맞이한 거라고 변명하고 포장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적으로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우울하면서 겉으로는 의롭고 자신감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이 없되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의’란 도달불가능한 정상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의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왜 예수님이 필요할까요?

 

결국 우리가 순수하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온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협박하면, 예수 믿는다고 말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자신있어요.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라고 하면 그게 진짜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순간 죽음의 문앞에서 용기를 내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길고 긴 인생의 고해 속에서 사랑과 의를 실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까 살펴본 것처럼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우리 삶 속의 여러 여건들 때문에 뜻하지 않게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그 자체로 의를 위하여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됩니다. 의를 행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요즘 세상에 누가 사자 밥으로 만들겠습니까? 누가 총칼로 위협하겠습니까? 단지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고난을 당합니다.

 

단지 먹고사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필수 소유물들로 삶의 수준이 높아진 현 시대에 내 삶을 거기에 맞추는 것만도 빚으로 이루어져 아등바등인데, 이 한정된 물질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개인의 삶의 자유가 존중되는 이 시대에 성경대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기에는 맞춰가야 할 생활양식 차이가 너무나 커서 갈등이 심화되어 3쌍 중 1쌍이 이혼하고 있는데, 꾹 참고 잠자코 성경대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것 역시 너무 어렵습니다.

 

일하고 잠자고 내 생활 챙기기도 바쁜데, 이 땅에 불평등을 해소하고 천국을 이루어가기 위해 정치적 관심을 가지고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정치인들 중에 누구를 선택하여 투표를 할지 고민하는 일도 버겁게 느껴집니다.

 

하물며 위안부 문제, 세월호 문제, 입시 비리 문제, 북한 문제, 미군 방위비 부담 문제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의롭게 사회 참여를 한다는 것 역시 요원하게 너무 어려운 일로 여겨집니다.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겹고, 때로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생각인 것 같고, 그렇다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어리석은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죽은 그리스도인 같아서 죄책감이 느껴지고...... 이렇게 어정쩡하게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예수님이 그런 우리의 한계를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혼자서 자기에게 박해를 주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도 다 고치지 않은 병자를 내가 다 고칠 수 없듯이,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관계를 맺은 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의’라고 믿습니다.

 

"소자에게 물을 주는 것이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내게 손 내미는 작은 요구를 짜증없이 들어주는 것, 내가 가진 욕구를 조금 유보하면서 타인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 그 작은 것으로도 예수님은 내게 ‘의’를 행했다 말씀하실 것을 믿습니다.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나 그런 삶을 지향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내 삶의 고난이 마치 의를 위한 것인 양 착각하는 오만을 버리는 것이 참으로 ‘의’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오늘도 평안한 하루가 임하길 바랍니다. 그곳이 천국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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