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은 헬라어 ‘카르디아’로 그리스인들에게는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을 가리키고, 비유적으로는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합니다.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사용된 용어로 도덕적 종교적 정결을 의미했습니다.
즉 ‘마음이 청결한 자’란 모든 감정과 사고, 행동의 원천인 마음을 도덕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당당할 만큼, 종교적으로 떳떳할 만큼 청결하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으로 청결하게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인됨과 깨끗케 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볼 것이다’라는 말은 헬라어 ‘와손타이’로서 ‘보다’라는 뜻 ‘호라오’의 미래형입니다. 이 단어는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보다니요? 누군가 21세기에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병원에 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과학적이고 증명가능한 사고 체계를 발달시켜온 인류는 이 점 때문에 종교적 문제를 골치아파합니다. 분명히 인간은 어떤 종류의 소망과 희원과 갈망과 믿음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는데, 그것을 볼 수가 없고 증명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간 존재의 모호한 소망과 바람과 믿음에 대해서 ‘종교적 도약’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증명할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그런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현상이 있다는 것으로 종교 현상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이에 대해 복음주의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출애굽기 24장 17절에서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라는 구절을 가지고 현대 신학자들에게 대항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시내 산 위에서 시공간상 연속성을 지닌 역사적인 광경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훗날 이 세대가 죽은 뒤에라도 모세는 모압 평지에 서서 이 광경들을 볼 당시 어린이였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보았다! 너희가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실존주의가 말하는 종교적 도약과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만큼 시공간상의 연속성을 지니는 강력한 기반이 된 것이다.
왜 구약에는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왜 오늘날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설악산이나 한라산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맹렬한 불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과연 좋을까요? 그 광경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다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여호와라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본다고 해서, 보았기 때문에 제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앞에서는 어떠한 거짓도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죄를 저질러온 사람이 어느 날 죄가 폭로되어 드러날 때 오히려 그 순간이 하나님을 본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모태신앙으로 자라 뜨뜻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며 뒤에서 남모르게 죄를 저질러온 사람이 그 죄가 드러나 큰 형벌을 받게 될 때에야 비로소 “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지금도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마음이 청결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을 받으면서라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묻는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므로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그가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그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비로 그가 벌을 받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였음이 증명되고, 반복적인 죄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그에게 있어서 그의 마음이 청결한 자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때로 긍정적인 하나님의 보이심에 관한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이나 종교적으로 위험한 지역에서 선교를 하시는 분들 주변에서 성경에 나올 법한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풍문을 듣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죽음의 위험에서 적들의 눈을 가려 보호하시기도 하고, 교통수단이 없는 곳을 가던 선교사가 죽음의 위기에서 마치 축지법을 쓴 듯 순식간에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는 소식도 듣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소식들을 들으며 우리는 “믿지 못할 소식이다”라고 해야 할지 “기쁜 소식, 복음이다”라고 해야 할지 결정할 상황에 처합니다. 그 결정은 자유의지입니다.
믿지 못할 소식이라고 결정하면 우리 자신의 존재의 근원은 우연 속에 던져집니다.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결정하면 우리 자신의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필연 속에 도착합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복음이라고, 하나님을 보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기로 결단하는 마음이 바로 ‘청결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며,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못할 소식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이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기를 간청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심으로 회개하게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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