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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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브린니 2020. 6. 5.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6절)

 

‘의’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죄인이나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의인’이 되었다라고 할 때의 ‘의’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의’는 영적인 의미로 세상에 속해 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제까지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구속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시에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정의를 뜻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뜻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뿐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이 땅에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갈망과 노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실현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사모하여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며 갈망하는 동시에 최종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푸른 잔디,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예수님은 먹이와 풀을 주시어서 배불리 먹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는 영적 배부름과 육적 배부름을 모두 포함합니다.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육적 배고픔과 정서적, 영적 배고픔을 모두 체험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모든 배부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얼마 전, 5월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야 할 시기에 어떤 면세사업자 크리스천 여성이 같은 직종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매출 100% 다 신고하세요? 저는 다 안하는데......”

 

그 크리스천 여성은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소그룹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다른 이들도 그 여성이 독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여성은 영적인 의를 소유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이 땅의 정의를 이루는 데는 아무런 갈망도 없다는 것이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녀가 크리스천이라서 더 의로운 삶을 산다고 생각할까요?

 

이 땅의 크리스천들, 특히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참 불쌍합니다. 일단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각종 헌금과 회비 등을 내면 거의 십의 이조 가까이 들어갑니다.

 

게다가 요즘은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도 거의 수입의 십일조만큼이나 들어갑니다.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절반 부담해 주니까 다행이지만, 아까 그 여성과 같이 개인사업자인 경우엔 본인이 다 지불해야 하니 부담이 큽니다.

 

교회에 들어가는 돈과 공적 사회보험에 들어가는 돈만 합쳐도 수입에서 십의 삼조는 쓴다고 봅니다. 여기에 집 대출 원금과 이자, 차량 대출금과 보험금과 유지비, 자녀 교육비 등을 생각하면 왜 한국의 가계 대출이 엄청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조금이라도 소득세를 줄여보려고 매출을 100% 신고 안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오히려 100% 신고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절세 혹은 약간의 탈세가 지혜인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세상의 정의를 위해 정직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들 잘 압니다. 어쩔 수 없이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해야 할 때는 적어도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조차 모른다면 사태는 정말 심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마태복음 말씀을 영적인 의로만 받아들이고, 실제적인 삶 속의 의로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신앙과 삶의 괴리가 일어나고, 이런 모습에 대해 예수님은 강력하게 “회칠한 무덤”이라는 용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부족한 수입으로 이 모든 지출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무엇일까요? 솔로몬의 화려한 성으로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헌금의 대부분은 교회 건축의 대출이자로 지출되고 있으니 하나님은 과연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실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땅이 없어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행 대출이자로 내어 오히려 돈의 신인 맘몬의 배만 불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화려한 건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대형교회에 수만명이 모여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아니라는 것!

 

오히려 초대교회처럼 어디든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모일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떡을 떼고 주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꺼이 물질을 내어 가난한 자를 먹이고 선교에 힘쓰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은 이런 의식이 많이 생겨서 직장 사무실이나 사업체, 가정 등에서 소규모로 모여 건축헌금이 필요없는 작은 교회들도 많이 생겨납니다. 또 온라인 상에서 모여 대화를 나누다가 가끔씩 카페나 야외에서 모이는 온라인 교회들도 있습니다.

 

건물이 있는 교회를 딱딱한 고체 교회라고 한다면, 온라인 교회는 공기 중의 기체 교회, 직장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는 때마다 이동하므로 유동적인 액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대한 땅값과 건축비를 지불하고 교회 시스템을 위해서 엄청난 자본과 노동력이 소요되어 신앙의 열정을 소진하지 않고,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혁신한다면 우리의 물질과 열정과 힘은 어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에게로 향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첫째 목표임을 알듯이, 그렇게 우리의 부족한 물질이 정말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신 곳을 향할 수 있고, 우리가 이웃에게 올바른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마르고 갈망하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열심히 많이 내면서도 이웃에게 의롭지 않은 크리스천이 되고 생활비에 쪼들려 늘 배고파 탈세를 시도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헌금을 내고 이웃에게 의로운 크리스천이 되며 정직한 세금을 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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