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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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브린니 2020. 6. 3.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이라는 말은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의 결과는 땅이라는 기업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삶은 역경의 연속에 처해 있습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한 시름 놓았나 하면 또다른 문제가 터지고,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면 뒤통수를 치는 사건이 생기곤 합니다.

 

애써 노력 끝에 일구어놓은 사업체가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에 의해 문을 닫게 되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취직 시험을 보려 했는데, 기업들이 일제히 취업의 문을 좁혀 어려움에 처하기도 합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이제 편하게 살 날만 남았다 싶을 때 건강에 문제가 생겨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지 못하거나, 배우자나 자녀의 사회적 실수 때문에 큰 봉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역경에 처해 고통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 인간이라면 당연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벗어날 수 있는 작은 구멍이라도 찾아보려고 애쓰게 됩니다. 일단 나라도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관계를 깨고 혼자 줄행랑을 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유’란 단지 외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고통을 감수하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나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외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폭력과 모욕, 수치와 잔인한 빼앗김 속에서 온유한 사람은 적극적인 사랑으로 그 고통을 감수하며 오래 참습니다. 어쩌면 벗어날 구멍을 찾을 수 없어서, 혹은 벗어날 구멍이 있더라도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고통을 인내하는 것입니다.

 

‘온유’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격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불길이 일어나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그 격노가 일어날 때 관용을 취하는 덕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일단 자기 자신의 격노에 대해서 관용해야 합니다. 격노의 불은 먼저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격노에 대해 먼저 관용을 베풀어 격노하는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인정하면서 그렇지만 계속 격노할 경우, 자신이 그 고통 때문에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을 위해 격노를 가라앉혀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해야 합니다. 격노를 잊을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고 가장 편안하고 가장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격노의 불을 가라앉힌 후에야 우리는 상대에게 관용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바로 남 모르는 고통입니다. 누가 역경에 처한 사람의 격노하는 심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격노를 가라앉히고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서 애쓰는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래서 그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돌로로사처럼 그 길을 걸어가는 온유한 자의 삶은 외롭고 슬픈 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하신 분은 그 길을 먼저 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기업으로 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땅’은 실제적인 땅과 영적인 땅을 모두 가리킵니다.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우리가 죽어서 갈 낙원이나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할 새 하늘과 새 땅만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기업으로 하루 세끼를 먹고 따뜻한 집에서 잠을 자며 가족과 함께 TV를 보고 웃기도 합니다. 온유한 자가 믿는 믿음 속에서 역경은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온유한 자는 우리가 먹고 입고 잠을 잘 모든 필요를 주께 맡기기 때문에 오늘의 행복으로 웃을 수 있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삶 속에서라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에 무사히 지내온 하루를 인하여 고요히 잠자리에 듭니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슬퍼해도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낼 힘은, 날 사랑하여 내 고통을 함께 하여 피 흘린, 피 묻은 왕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피가 나를 보호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피 흘리며 나도 웃습니다. 그 피 묻은 평온이 온유한 자의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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