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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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브린니 2020. 5. 3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죄로 인해 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꼭 육체적 생명이 없어져야 죽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자신이 기반을 두고 살아온 모든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잃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죽음을 죽는 사람들을 우리는 TV 뉴스에서 자주 봅니다.

 

뉴스에 등장한 사람들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죄로 인해 그런 사회적 죽음을 죽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때로 그들의 가족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들은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이혼을 하고 외국으로 이민이라도 가야 생을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죄 짓고 벌 받는 사람은 그렇다 쳐도 아무 죄도 없는 가족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슬플까?

 

우리가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때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다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 봅니다. 간음하던 여인을 돌로 치던 이들에게 “이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한다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하던 여인이 잡혀왔을 때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그 죄가 드러나 수치와 모욕을 당했을 때 이미 그 여인은 벌을 받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따른 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죄가 그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며, 아직 그 사람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는 않은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다른 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애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 실행하느냐 실행하지 않느냐만 다를 뿐 죄는 우리 속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죄가 드러나 수치를 당할 때, 그래서 그가 사회적 죽음이라는 벌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죄성을 들여다보며 두려워하고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혹은 그, 혹은 우리가 자랑하던 그 도덕성과 ‘자기 의’가 그렇게 허약한 것이며, 깊이 감춰진 죄성이 사실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숨어 있었던 것임을 다시 발견하는 애통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애통함은 다시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은 우리의 허약한 도덕성과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허위의 ‘자기 의’를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위로를 받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로(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애통하는 자를 예수님은 곁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 곁으로 가면 그분의 손에 구멍 난 못 자국와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삶이 바로 애통하는 것이었고,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죄인을 대신해 죽어주신 것임을 보게 됩니다. “너희도 이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죄와의 이 지난한 싸움이 때로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세상은 회복될 것 같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은 몇몇 기독교인들 외에는 관심도 없는 듯 밀려나 보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이 때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괴로운 싸움은 예수님의 위로와 함께 하기에 행복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애통함은 아프지만, 애통함 그 자체가 바로 예수님과의 동행입니다.

 

슬프고 아프고 외롭지만 그래서 행복한 싸움을 싸우는 모든 애통하는 이들에게, 오늘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전해질 마음의 사랑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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