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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168

초대 초대 청첩장을 받았다 결혼하는 두 사람 중 하나 내 이름이 쓰여 있다 참석할까 잠시 고민했다 내가 없는 나의 결혼식 나의 장례식엔 내가 없을 텐데 왜 나의 삶에는 내가 늘 등장하는 것일까 하루도 빠짐없이 인생에 출근했던 나에게 오래동안 휴가를 허락하는 법안은 언제 통과되는가 시체로 참여하는 장례처럼 둘 중 하나로 서 있는 혼례와 나 자신을 대신 하는 객관적인 삶 내 인생에 초대 받은 나는 초청장 없는 손님처럼 안절부절 풍경을 바라본다 착한 손님들로 가득 찬 해피마이라이프파티 창밖에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약간 숭고하다 2024. 1. 22.
사랑의 과잉 사랑의 과잉 사랑은 과잉이다 언제나 흘러 넘친다 사랑하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내게 기원이 없는 타자에게서 불어온 태풍이기에 내면의 쓰레기를 먼 바다로 내몰고 마음 한복판에 푸른 호수를 들여놓는다 사랑은 시간이 없다 역사를 허물고 미래가 정지한다 현존이 영원하리라 믿는다 사랑은 잠못든다 아주 작은 것들이 세계가 된다 입술 끝에서 우주가 흔들린다 사랑은 모든 장소를 초월하고 혀가 불탄다 수많은 형용사들이 쏟아지고 뱀들은 지혜를 읊는다 간혹 사랑의 거짓말은 사랑보다 많다 사랑이 결여하는 것은 없다 인간 스스로 파놓은 깊은 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것 사랑은 치유를 넘어 스스로이게 하는 것 침묵하면서 희생하는 행위로 타자와 일치하는 거룩함 젊은 엄마가 빵을 자르고 딸들이 오물거리며 살을 뜯어 먹을.. 2023. 8. 28.
기억에 관하여 기억에 관하여 기억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한 장소에 머물러 있다 어떤 나쁜 것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쁜 것이 그립다 그것이 기억의 정체성이다 진실이 숨은 장소에 붙박이는 것 자유 기억에서 풀려나는 것 기억상실증 자유에 대한 무지막지한 저항 불행을 뒤로 미루는 행위다 기억은 침묵하고 자유는 말한다 그러나 말은 거짓으로 옷 입고 벌거벗은 자유는 진실을 외치기 전 도덕의 매를 맞는다 진실이 무서운 사람들이 예술로 도피한다 예술은 폭로하지 않고 포장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눈멀고 취하고 질식한다 기억이 미(美)로 바뀔 때 낡은 장소에는 새 건축물이 떠오른다 부요하고 여유롭고 넉넉하다 다른 시각으로 보고 기분좋게 취하고 숨을 쉴 수 있다 역설과 반전으로 기억은 자유롭다 시간이 되살아난다 기억도 나이를 먹.. 2023. 8. 17.
카페에서 카페에서 시청이 보이는 카페 창가 자리에서 그녀는 블로그에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나눈 것들을 올리고 있다 주문한 커피는 몇 모금 마시지 않고 식어가고 있다 마침내 가득 담긴 커피를 발견하곤 아 내가 그렇다니까 무슨 일을 하면 지나치게 열심히 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다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주변을 돌아보는가 혹은 누가 그토록 진심으로 자기 일에 몰두 하는가 인생에서 적당히 해서 가능한 일도 있던가 카페에 와서도 스터디에 몰두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노트북에 빠진 사내도 귀에 꽂은 음악에 황홀한 처녀도 있다 일생 한 번밖에 맛볼 수 없는 평온하고 나쁜 일은 눈곱만큼도 생각나지 않는 휴일 오후 카페는 그래서 온동네 무궁화꽃처럼 피어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존재하는 것은 짜릿하다 먼지처럼 사는 일 없는.. 2023. 8. 15.
아내에게 아내에게 사진을 보내오 꽃이 다 시들고 있으니 꽃의 옛모습을 기억하시길 그대 생일이었던 8월 어느 날 슬픔은 극에 달하고 죽음 너머 숨은 빛이 가녀린 숨을 비틀고 바람은 사람들 사이를 돌다 당신 허리에 멈추었소 꽃 곁에 푸른 심장을 함께 넣어두었으니 세심히 찾길 바라오 언제나 죽음을 되새기던 사람은 그대인데 내 손에서 어둠의 흔적이 번들거리오 검은 빛이 오래동안 그대와 나 사이를 가두었오 둘이 하나가 되거나 셋으로 분열하거나 깊은 곳에 있던 사랑의 침묵은 말하고 이해하는 보통사람의 장소에서 메아리치나 보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소 당신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죽었으니 만인을 구원하였소 생일날이 축복인 것은 죽음을 예비하는 첫날이어서지만 사는 날이 모두 생일 같은 축복.. 2023. 8. 14.
사랑의 생일 사랑의 생일 사랑은 저만치 먼 곳에서 울고 있다 사랑이 등을 붙이고 흐느끼고 있다 내 마음 멀리 달아난 당신이 그립다 가슴팍에 묻은 볼 수 없는 얼굴이 불안하다 사랑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 무엇이 사랑을 증언하는가 떨림과 설렘, 약간의 흥분과 말 못하는 느낌과 몇몇 감정들 부산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으스댄다 서른 몇 해 생일날 새벽어둠 구석에 당신이 누워 있다 부지불식간에 내가 죽인 시체처럼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난다 다리를 들어 올려 허리를 깊게 넣고 심장에 뺨을 댄다 나쁜 생각을 한다 사랑을 완성하는 레퀴엠 사랑은 수천 개 세포로 쪼개진다 두려움은 늘 당신 몫이었는데 무서워하는 아이는 꿈으로 도피한다 사랑은 거기서 황홀하고 멋진 신사 같다 사랑은 미래에 나이가 들어서 삶을 긍정할 것이다 과거가 깡.. 2023. 8. 5.
사랑 사랑 사랑인데 감추는 사람들이 있다 헤어졌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다 미워하는데 좋은 척 하는 사람도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알고 있는데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데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는 일도 있다 변명할 기회도 없이 진심과는 무관하게 사실 그대로만 드러난 채 왜곡과 변형을 거쳐 사건이 종결될 때 팩트 외 스토리는 묻힐 때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할 때 복수를 다짐하고 십년 계획을 세웠으나 아무런 힘도 없을 때 비겁해서 숨고 숨은 것마저 들켜 창피해서 다시 숨으려고 주위를 둘러볼 때 아무도 날 보는 사람 없고 세상이 투명해질 때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오래 처박아 두어 낡은 사랑은 2023. 7. 31.
결정론자 자크 결정론자 자크 그는 사랑은 자질이라고 말했다 아무나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사악한 것은 사람의 기질이라고도 했다 의도치 않게 죄을 지었다고 터무니 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래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을 쉽게 믿었고 금세 사랑에 빠졌고 고민 없이 용서했다 상대가 곧 반격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려 들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착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자질이며 기질이었다 돌은 깊이 박히지 않으면 누군가의 손에서 무기가 된다 구르는 것은 날 수 있고 다른 어딘가에 박힐 수 있다 돌은 바위가 아니다 산다는 것이 노력해서 되는 일이던가 인생은 원하는 곳으로 난 길이 아니므로 예기치 않게 불행을 만나는 일 따윈 발생하지 않는다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 2023. 7. 29.
인생공부 인생공부 카페에 일가족이 들어왔다 정확하게 13명이었다 불길했다. 숫자부터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까지. 그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13잔의 차를 주문하고 드디어 케이크를 꺼내 생일 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나름 교양있었다 가족들은 웃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해피버스데이 투 유 해피버스데이 투 유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침묵하는 생일 축하송 박수소리는 작지만 잘 들렸다 촛불은 할머니가 껐다 그녀의 생일이었나 보다 무슨 이유인지 나갔다 들어온 식구 둘 셋이 늦게 자리했다 다 끝났다며 다른 가족들이 놀렸다 가족들은 케이크를 분주하게 나눠 먹었다 다들 웃고 있어서 행복해 보였다 SNS 시대에 여럿이서 웃고 떠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마철이라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초록이 더 파랬다 카페에는 이런저런 장.. 2023.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