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시, 짧은 소설)'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본문 바로가기

창작글(시, 짧은 소설)168

[창작시] 신청곡을 연주해드립니다 신청곡을 연주해드립니다 -임현정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복지관 아이들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를 들으며 잠이 든다 아이들에겐 푸근하고 따뜻한 침대가 없다 다만 하루 동안 느낀 우울과 분노와 아픔을 내려놓고 드러누울 뿐이다 광고에 나오지 않는 메마른 메트리스 위로 복지사 J는 어둠 속에서 je te vuex를 듣는다 아이들은 사랑받을 줄 모른다 자신에게 사랑을 주려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며 달아날 뿐이다 변주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데 삶은 칙칙하고 좀스럽다 J는 생각한다 음악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음악이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 가끔은 짜증이 난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삶은 눈곱만큼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다른 유트브 채널을 찾아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2악장을 듣는다 그토록 유쾌하게 천상의 소리를.. 2023. 5. 4.
[창작시] 맥베스 맥베스 예언은 그의 마음을 읽는 데서 시작했는가 혀의 유혹이 그를 욕망하게 했는가 운명은 어디에 도달하는가 그릇된 생각들 목적지 없는 죽음을 향한 드라이브 맥베스는 왕관을 쓰고 홍포를 걸치고 금으로 장식한 채 피묻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얻은 것은 옷가지와 장신구뿐이었다 레이디 맥베스만 그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타인의 운명을 욕망하는 여자는 비통하게 죽음을 맞고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왕관과 금장식 홍포를 빼앗기고 피묻은 흰 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는 헐벗은 주체가 되었다 죄를 뒤집어쓰고 죄 그 자체로 처형되는 그는 마치 예수처럼 보였다 악을 벗었을 때 사람은 인자가 된다 *인자 : 유대인의 전통에서 인자란 가장 힘없고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일컫는다. 예수는 자신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인자라고 말.. 2023. 5. 2.
[창작 시] 우리는 바다로 갔다 우리는 바다로 갔다 우리는 언젠가 그곳으로 갔다 비가 오고 있었고 날씨가 맑았다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흐린 날의 시간들은 대체로 청명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는 재료 소진으로 입장할 수 없었고 갈매기가 앉은 테라스에 서서 바다를 향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우리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면 우리가 알고 있던 머릿속 바다가 풍경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한 남자와 함께 그곳으로 갔고 사람들은 여자의 남자를 알지 못했다 그 남자는 세상에서 지워진 남자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찍은 사진에는 바다가 한귀퉁이 들어와 있었다 여자의 치맛자락처럼 거대한 바다의 끄트머리 파도와 거품이 살짝 보였을 뿐이다 자동차 안에서 헨델의 피아노곡을 들었다 처음 듣는 곡이어서 .. 2023. 4. 30.
[창작시] 시간을 마중하다 시간을 마중하다 ―길병민 노래를 들으며 문득 새벽 두 시에 깨어나 그는 피아노 치는 형을 불러내 노래를 부르러 갔다 그는 늘 노래가 아니라 울음을 불렀다 야수처럼 맹수처럼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의 노래는 너무 치명적이어서 자기 자신의 가슴을 찢었다 불행하다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외부로부터 들이닥치는 부당한 고통과 불행을 아무에게도 호소하지 않고 삼킬 때 타인에게 치료제가 되었다 고통만이 인간이 신보다 위대해지는 순간이다 청춘시절 서울의 외곽은 어두웠고 추억을 파는 것은 비겁한 자의 변명일 뿐 과거는 미래를 위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그는 노래할 뿐 그는 침묵할 뿐 이유를 알 수 없는 타인들이 그의 찢긴 가슴을 엿보며 경이에 휩싸여 정신을 잃는다 시간은 망각되지도 되찾을 수도 두.. 2023. 3. 26.
[창작시] 그대의 찬 손 그대의 찬 손 3월 중순인데 꽃을 시샘하는 바람 불고 검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젊은 성악가의 공연을 보러 가는데 운전대를 잡은 손이 차다 "오늘은 장갑을 끼고 오지 않았네" 집을 나설 때 남편 말을 무시했는데 요즘 날이 너무 좋아서 까맣게 잊었는데 손이 시리다 "손이 이렇게나 차?" 남편이 놀란다 라보엠 여주인공은 병들어 죽어간다 쳐도 멀쩡히 산 사람 손이 이렇게 차다니 아내의 손을 처음 잡은 듯 그의 손이 떨린다 남편의 손은 온기로 따뜻하고 고스란히 내게 전달된다 내 손은 달아오르고 그의 손 온도는 내려간다 한 손으로 운전을 해도 위험하지 않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으니 든든하고 푸근하다 데워진 손으로 찬 손을 문지른다 한 사람의 손이 이토록 다르다니 아수라백작처럼 내 속에 두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2023. 3. 12.
[창작시] 명상하는 밤 명상하는 밤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복잡하네 남편의 팔을 베고 가슴에 얼굴을 묻어도 머리엔 온통 근심과 불안 가슴이 미어지고 세포가 녹아내리네 어느새 남편은 코를 골고 세상엔 어둠과 나만 남았네 홀로 깨어 있다는 사실 양자택일할 시간이 왔네 호흡을 고르고 명상을 시작하네 길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숨을 거둬들이네 호흡을 반복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네 심장에 피가 돌고 세포들이 부스럭거리네 드디어 세포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네 우린 오늘에 있는데 너는 왜 내일로 먼저 가버렸니 우린 오래 살 수 없는데 너는 미래까지 걱정하니 오늘을 사는 세포가 내일을 근심하는 머리에게 말하네 몸은 하나인데 머리 혼자 내일로 떠난 뒤 세포들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걸 나는 명.. 2023. 3. 5.
[창작시] 러브 스토리 러브 스토리 너를 만났지 단풍이 깔린 마로니에공원에서 너를 기다렸지 모차르트 카페 서두르며 공원을 가로지르는 너의 초조한 얼굴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네 그해 겨울 찬바람과 눈보라 하염없이 걸었지 너는 목 깊은 스웨트를 내게 입히고 가슴팍으로 숨어들었네 내 마음 푸르고 너는 드러누워 하늘을 보네 청춘이 지고 있었고 봄은 더 미뤄지고 멀지만 잊지 못하지 은행으로 물든 벤치 폭설에 무너진 창경궁 뒷길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었고 밤은 축복과 아픔을 함께 주었지 두 사람은 서른 해 지나서 추억하네 그해 가을 겨울 노랗고 붉은 나무들 파란 밤을 수놓던 슬픔의 눈을 2023. 2. 22.
[창작시] 햇빛과 어울리다 햇빛과 어울리다 당신에게 가는 길 햇빛이 너무 좋았습니다 예전엔 좀 어둡고 축축하고 깊은 우울을 즐기곤 했는데 어찌보면 그게 다 살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에 폭풍과 폭설이 몰아닥치고 보니 아 햇빛이, 한뼘의 햇살만으로도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봄이 오는 들녘 농가에서 빠알간 딸기를 꺼내놓았습니다 눈 덮인 땅에서 핀 꽃은 물이 더 짙게 들었습니다 갑자기 훅 들어온 서쪽바다는 태양을 향해 빛을 되돌립니다 그림자조차 없이 투명한 당신의 마음에 응답하는 것이 속된 내 영혼의 마지막 기쁨입니다 햇볕이 잘 드는 사각형의 집에서 당신과 살고 싶습니다 담장 없는 마당에 파란 장미가 얕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2023. 2. 19.
[칭작시] 아내 사랑 아내 사랑 깊은 곳에서 마음 하나 떠오른다 가볍게 웃는다 더 깊은 곳에 마음이 숨는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갚을 수 없는 천냥 빚 가끔 마음은 불쑥 솟아나 울고 웃고 노래한다 혼자서만 당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설레고 속으로 속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외친다 초승달 같은 마음 채우고 덮고 다독거려서 만월이 되는 사랑 다시 기울고 텅 비어 당신만 오롯이 가득 들어차는 마음 2023.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