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시, 짧은 소설)' 카테고리의 글 목록 (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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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168

[창작시] 안개 안개 새벽에 안개뿐이었습니다 두텁고 짙고 깊은 빽빽하고 촘촘히 짠 구름 속을 걷는 느낌 그날 아침엔 안개가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피부에 스며들었어요 이러다 곧 심장과 폐를 갉아먹을 듯 불안과 약간의 공포에 젖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볼 수 없는 먹먹함 그날 아침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었던 것일까요 증평에서 외박을 나온다는 사내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한참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습니다 안개가 전파를 삼켜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군에서 젊은 남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옛말일까요 조금 늦을 뿐 사내는 구릿빛 단단한 얼굴로 웃으며 나타날까요 안개 때문에 기대와 기다림은 발이 묶여 초조와 긴장으로 바뀝니다 종이로 빚은 결코 썩지 않고 빛이 바래지 않는 꽃다발은 희미하게 반짝거립니다 생생하던.. 2022. 10. 11.
[창작시] 비 오는 날의 산책 비 오는 날의 산책 공원의 흔들 벤치는 늘 비어 있고 비어 있어서 여유롭습니다 쓸쓸하거나 허전한 것과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홀로 있는 듯한 고독이 아닌 스스로 있음입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지만 바람을 타고 나아가고 들어섭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멈춰 있습니다 그동안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요 누군가 걸터앉아 좀 더 세차게 흔들리기를 혹은 요람처럼 사람을 편히 재우기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나무처럼 수백 년 늙어가기를 시간이 그를 흔들지만 오늘도 그냥 지나칩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노을이 지날 때 가장 절정입니다 바닷가에 놓여 있는 그네 의자는 사람을 태웁니다 석양 한가운데로 위태롭게 사람은 한점 풍경으로 소멸합니다 그는 불붙는 시간 동안 흔들리면서 동시에 정지 상태로 시간을 거스.. 2022. 10. 10.
[창작 시]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오후만 있던 일요일 이렇게 가다보면 끝도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내가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바다가 나올 때서야 멈출 수 있다 어느 경계선 앞까지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질주할 수 있다 가끔은 자유가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다 언젠가 한두 번 가본 적 있는 길 처음인 듯 달리는 기분 같은 길을 맴돌면서 누리는 자유를 끊을 수 없다 착각하는 자유 중독 사람들 모두 멋진 트루먼 쇼 황홀한 메트릭스를 꿈꾼다 어쩌면 사랑은 자유에 대한 용서일 수도 있다 자유의 끝에서 만나는 바다 바다는 세상을 둘러싸고 덮는다 사랑은 자유가 몰고왔던 죽음과 상처를 천천히 녹인다 냉전이 뜨거운 평화로 바뀌는 지구종말의 시대 사랑은 자유를 해방한다 비염 약을 먹은 탓에 꿈 없는 영상에 시달리며 눈을 떴을 때 아내는 .. 2022. 9. 11.
[창작 시]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 오늘 아침 하느님이 너무 세게 빗질을 하신 탓에 하늘에 구름이 몇 개 보이질 않네요 태풍이 지나간 뒤로 바람이 잠잠하네요 가을이 발뒷꿈치를 들고 사뿐히 들어왔네요 오늘은 저녁에 뮤지컬 관람이 있답니다 ​ 나이 오십에 다시 사랑을 시작한 여자는 대형마트에서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었어요 젋고 뚱뚱한 사내가 길길히 날뛰며 욕을 해댔습니다 여자의 남자는 웃으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사내를 달랬지만 싸움이 커질 뻔해졌습니다 ​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말다툼이 생겼죠 오늘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럴까 여자는 심장이 급하게 뛰고 허벅지 안쪽이 떨렸습니다 사람들과 좋지 않았던 해묵은 트라우마까지 떠오르고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아픔은 저절로 낫질 않고 시간과 피터지게 싸우다 겨우.. 2022. 9. 10.
[창작 시] 주말 오후 풍경 주말 오후 풍경 춘천에서 반가운 사람들이 노래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곧 태풍이 오는데 그곳은 평온할까요 주말 늦게까지 일하고 세 시간을 달려가야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니 돌아올 일이 아득하고 먼 곳에서 밤을 새우자니 걱정이 앞섭니다 그냥 가까운 바다에 가서 바람 부는 것을 구경할까 망설입니다 일하다 보면 짜증날 때가 있어 훌쩍 떠나고 싶어집니다 서울의 첼로 공연이나 다른 도시의 오폐라 음악은 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신 앞에서 통곡하거나 신이 인간에게 하는 말씀을 고요히 듣거나 음악은 세상 너머로 잠시 데려다 놓습니다 바다를 보려면 저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은 굽이굽이 길들을 풀어놓고, 길섶엔 벼가 자라고, 복숭아, 토마토, 샤인머스켓 재배 농가, 아이들이 없는 초등학교와 덩치만 큰 교회와 천년 묵.. 2022. 9. 4.
[창작 시] 병든 뮤즈 2 병든 뮤즈 2 노을이 번지는 등대 아래 방파제에 앉아있으면 어딘가로 둥둥 떠내려가는 듯 바람이 파도를 밀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어둠이 야금야금 바다를 먹어들어오면 불안이 마음 끄트머리를 점령합니다 장마가 물러가면서 침수됐던 세간들이 모두 털려나간 것처럼 사람 마음이 삽시간에 텅 빈 것 같다고 느낍니다 아내는 사랑하는 개를 꽉 끌어안습니다 수북한 털에 얼굴을 비비고 헐떡이는 심장의 온기를 느끼면서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씁니다 컹컹컹 개는 두려움을 쫓듯 세게 짖고는 마음을 앓는 아내의 어깨에 고개를 떨굽니다 항구 저편에서 틀어놓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어쩌면 붉은 기운을 품은 구름 저 너머에서 연주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쁨도 아픔도 애증이나 분노 모두 예술이 되는 저물녘입니다 뮤즈는 .. 2022. 8. 28.
[창작 시] 모차르트의 산등성이 모차르트의 산등성이 구불구불한 소나무들과 둥근 계단식 논이 모차르트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크풍의 키리에와 근대풍의 그리스도 장음계와 단음계, 반음계와 이명동음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모방할 수 없는 균형들 산과 숲과 나무와 논과 방갈로 도시풍 카페가 예외로 가득 찬 법칙을 이루고 있다 부자들은 산언덕에 집을 짓는다 길을 내고 물을 대고 풍경을 만든다 문화는 늘 인공적이다 그걸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자연도 화장을 하고 옷을 입을 때 아름다운가 침묵하던 원초의 음은 천재의 악보에 담길 때 소리를 낸다 세상 모든 악기들이 똑같은 음을 서로 다르게 연주할 때 하나의 법이 완성되는가 아름다움이 도열하는 군대의 법 무정부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절제와 관용과 공감 “죽음은 지난 몇 년간 나의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2022. 8. 23.
[창작 시] 병든 뮤즈 병든 뮤즈 1 정오가 지나면서 구름을 걷고 나온 햇살이 고와서 장마와 가을의 중간 어디쯤 마음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사이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햇빛 빛과 빛의 틈으로 도시의 옆모습이 언뜻 열리고 아이들이 노란 버스에 올라탑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변덕이 죽 끓는 듯한 아이의 마음을 늘 토닥여야 하니까요 코로나 후유증이 깊은 아내는 역류성 후두염으로 고생하지만 우울에 빠지지 않으려고…… 그래, 바다를 보러 떠나자 2 눈앞에서 바다는 점점 뒤로 물러서고 연한 갯벌이 평화롭게 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바다를 밟고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 같습니다 파도는 연인의 거친 손처럼 까슬하게 피부를 자극합니다 여기서는 사람도 그저 풍경으로 박혀 있으니.. 2022. 8. 21.
[창작 시] 독일 가곡 연주 듣기 독일 가곡 연주 듣기 ​ ​ 소프라노는 목이 파인 드레스를 피아니스트는 옛날 고등학교 교복 같은 복장을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앤 선즈 그들은 모두 장례식에 온 듯 검은색이었다 ​ 아내는 공연 카탈로그 가사를 꼼꼼히 살피며 외국 노래를 감상할 준비를 단단히 하는데 나는 가수의 목소리와 기교 독일어가 주는 음성학적 풍미를 즐기면 족하다고 여겼다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이 예술을 향유하는걸 가로막을 뿐이라며 ​ 성악가는 깔끔하고 단단한 목소리에 오페라 아리아에 어울리는 조금은 과한 동작으로 슈만을 불렀다 곡은 너무 짧았고 독일어가 전달하는 묵직하고 깊은 감정을 맛볼만 하면 이미 끝나 있었다 연가곡 열두곡이 쉼없이 이어지자 살짝 졸리기까지 했다 아 이러면 아내의 감상법이 승리를 거둘 톈데 정신을 차리자 1부가 끝났다.. 2022.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