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운수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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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 시] 운수 좋은 날​​

by 브린니 2022. 9. 10.

운수 좋은 날

 

 

오늘 아침 하느님이 너무 세게 빗질을 하신 탓에

하늘에 구름이 몇 개 보이질 않네요

태풍이 지나간 뒤로 바람이 잠잠하네요

가을이 발뒷꿈치를 들고 사뿐히 들어왔네요

오늘은 저녁에 뮤지컬 관람이 있답니다

나이 오십에 다시 사랑을 시작한 여자는 대형마트에서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었어요

젋고 뚱뚱한 사내가 길길히 날뛰며 욕을 해댔습니다

여자의 남자는 웃으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사내를 달랬지만 싸움이 커질 뻔해졌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말다툼이 생겼죠

오늘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럴까

여자는 심장이 급하게 뛰고 허벅지 안쪽이 떨렸습니다

사람들과 좋지 않았던 해묵은 트라우마까지 떠오르고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픔은 저절로 낫질 않고 시간과 피터지게 싸우다 겨우 잦아듭니다

그놈 참 힘이 세고 질기고 까탈스럽습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슬프고 가혹한 고문이지만

신성한 충만으로 가는 걸음걸음이기도 하지요

한발짝 한발짝 빼놓지 않고 다 걸어서 기어이 도달하는 미래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젊은 시절 호수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내면의 눈으로 세상을 멀찍이 바라보고 섰던 때를 떠올립니다

 

늙는다는 것은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위태롭고 순수한 시간입니다

아무도 노인에게 자비롭지 않습니다

두 노인이 서로 기대는 것만이 삶의 안녕을 지켜줍니다

세상사를 다 겪고 지혜로워진 남자는

숱한 경험 때문에 요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춘기 소년처럼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보살핌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았기에

문득 아내는 남편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충직한 개처럼 그저 주인 곁을 지키며

가끔 컹컹 짖으며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하지요

개 짖는 소리가 음악처럼 늘 푸른 하늘의 울림처럼 마음을 흔듭니다

여자는 새롭게 시작한 사랑에 기댑니다

신의 선하심에 의지하듯

키가 큰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내려놓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데 구름이 서쪽으로 몰려갑니다

하느님이 바쁘게 빗질을 하시는 모양이네요

하느님은 게으르지도 부주의하지도 않고 늘

한결같이 세상을 가꾸시네요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부추겨 어루만지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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