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시, 짧은 소설)' 카테고리의 글 목록 (6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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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168

[창작 시] 논 따모 삐우(non t'amo più) 논 따모 삐우 ​ ​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으리 베이스 바리톤 남자는 절절히 떠난 사랑을 노래하는데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더 크게 사랑을 외치는 비명으로 들린다 폭우 사이로 불타오르는 얼굴 길은 물에 젖어 비틀거리고 자동차는 취한 듯 길 밖을 달리려고 으르렁거린다 사랑만큼 배신을 잘 하는 감정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거짓말도 없지만 길을 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을 반복하는 일은 언제나 슬프나 옳은 짓이다 비 때문에 바다에 가려는 생각을 접고 찻집에서 고요히 책을 읽다가 어느 소프라노가 부르는 슈만과 말러의 연가곡을 들으러 예술의 전당엘 간다 바다는 늘 거기 있으니 감흥이 적고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뒤섞여 새로운 자연을 다시 만들어내서일까 오늘 한 끼밖에 먹지 못했으나 지상의 양식에 배.. 2022. 8. 16.
[창작 시] 바다 풍경 바다 풍경 -당진에서 섬 위에 패션 아울렛 창고가 있습니다 문을 열면 툭 숲이 튀어 나옵니다 파도를 밟고 자라는 나무들이 숨을 뿜습니다 모차르트가 장송곡을 연주하는 일요일 오후 사람들은 신성한 빵을 먹습니다 여러 곡물 씨앗을 삼킨 배에서 양식이 흘러나오고 시를 읊는 개는 레몬라즈베리 술을 마십니다 어디서부터 초월이며 피안인지 알 수 없도록 졸음이 쏟아집니다 코앞에서 서해대교가 바다와 도시를 잇고 갯벌에는 잠자리가 쌍을 지어 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위태로운 집에서 한낮에도 축제를 벌이는 겨울사람들이 두번째 장송곡을 틀어놓았습니다 목요일에 걸려온 전화는 죄책감을 덜게 합니다 다른 도시에 다녀온 아이 하나가 병을 옮겨왔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이의 목숨을 속량합니다 개는 사람들의 일상사로 시를 짓고 나무.. 2022. 8. 15.
[창작 시] 생활시 생활시 코로나 19 후유증에 가슴이 뛰고 역류성 후두염까지, 죽과 꿀로 버티는 아내를 위해 유황한방오리를 먹으러 나섰다 한약도 한 첩 먹어보자고 며칠 뒤 예약해뒀는데 처이모로부터 전화가 와서 며칠 전 장모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쓰러져 얼굴에 멍이 들었다고 한다 아내는 얼른 흑염소를 달여 드시게 하라며 한약 지르려던 값을 이모께 보냈다 장모는 딸에게도 안 좋은 일에는 입을 닫았다 좋은 소식 나누면서 살기도 어려운데 나쁜 일로 맘 상하면 못쓴다는 생각이셨다 서른 두 살에 장모는 자궁 외 임신이 되어 자궁을 통째로 들어내야 했다 그 뒤로 다리에 힘이 없어 늘 손 짚고 일어섰는데 이제 나이 들어 팔에도 힘이 떨어져 얼굴을 찧은 것이다 얼굴에 멍빛이 바뀔 때마다 혼자 울었다고 한다 엄마한테 약값을 보내고 나니까 속.. 2022. 8. 14.
[창작 시] 바다가 보이는 바다가 보이는 사흘 전 왔던 길을 완전히 똑같이 달려왔습니다 그날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산길을 돌아나왔을 뿐인데 오늘은 바다를 보려고 나섰더니 네비게이션은 우리를 산을 넘게 했습니다 매일 당신과 높고 낮은 길을 오르고 내립니다 일상과 여행이 다를 바 없이 하루는 그냥 돌아오지만 다음날은 멀리 떠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분량뿐인 것 같아요 두부처럼 심심하지만 배부르고 두텁습니다 사람을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끄는 건 당신을 위해 작은 배려를 쉬지 않는 일입니다 한 톨의 미움도 흘리지 않는 잘 지은 솥밥처럼 사랑이 단단하게 시간의 공백을 채우는 것 술이 익어 풍미와 향을 주고받듯이 보상 없는 내어줌이 영혼을 채색합니다 갑자기 금방 따온 딸기 같은 잇몸으로 웃는 아이들이 바다에서 튀어나옵니다 꿈에서 그랬던.. 2022. 8. 9.
[창작 시] 시간의 집 시간의 집 당신을 용서하는데 8년이 걸린 것일까요 아니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걸까요 일흔번씩 일곱번 어리석은 용서가 멈추고 사랑은 죄와 허물을 다 덮고도 용서마저 묻었네요 이제 기억을 지우고 상흔이 바래고 마음에 새살 돋고 건강하렵니다 사랑을 자주 말하고 행복을 되뇌이면서 당신과 함께하는 최초의 두 사람처럼 에덴은 형상과 모양 없이 세상보다 큰 내면에 집을 짓습니다 시를 쓰는 개가 노을을 향해 짖습니다 모래시계는 바다를 덮고 잠을 청합니다 영원이 영혼을 정지하는 시간 너머로 데려가면 날을 알 수 없지만 거듭 거듭 살고 삽니다 문을 닫으면 모든 과거의 풍경들이 잠잠이 액자를 갈아끼웁니다 미래는 오래전부터 여기 살고 있었습니다 2022. 8. 8.
[창작 시] 드라이브 드라이브 노을이 하늘 끄트머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대가 모는 전기자동차를 타고 좁고 가파른 짙푸른 나무 그늘 사이 산길을 넘어갔다 베이스 바리톤 남자가 부르는 사랑 노래가 실내를 가득 채웠고 어쩌면 저토록 찢긴 감성이 튀어나오려면 인생이 얼마나 망가져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저녁이 밀려들면 항상 불안했던 어린 시절부터 노을이 물들기 조금 전 숨죽인 햇살을 그리워했던 젊은 날들에 나는 어떤 미래를 상상했던가 늙은 여자의 집에 빌붙어 살면서 개처럼 사랑받는 것는 어떤가 욕망의 어두운 숲길을 돌고 돌아 나오면 주황빛 따스한 초현실주의자의 집이 불쑥 나타났다 지도 어느 지점을 그릴 수 없는 세상만큼 큰 해피하우스 비가 왔다 더 멀리까지 달릴 수 없어 마음이 놓였다 도시 몇 개 너머까지 발을 떼지 못하는 그대.. 2022. 8. 7.
[창작 시] 강기슭에서 거듭 강기슭에서 거듭 당신의 깊은숨에는 많은 물소리가 들려요 한숨과 시름과 분노와 공포 슬픔을 지나온 무기력 자책과 죄책감, 섣부른 심판 사랑에 대한 갈망과 사랑할 수 없음에 기막힘 다 들어있네요 당신은 말 없는 노래를 불러요 침묵하는 강물의 여리고 푸른 숨소리 강을 건너야 한다는 당위와 결코 건너겠다는 강박과 건너지 못하리라는 불안과 실패의 두려움과 자기 배신감 마음에 녹슨 쇠를 예까지 끌고 왔어요 히로시마행 다이너마이트를 벼리고 강 건너 저편을 바라봅니다 세상에 없는 숫자를 셉니다 관념 속 숫자는 죽은 것일까요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경우의 수 당신은 오래된 신발을 벗어둡니다 노래도 그치고 침묵도 멈추는 때 강을 건널 수 없다면 어우러져 물의 몸이 될 수 있겠지요 당신의 숨에는 두터운 강이 흐릅니다 살아.. 2022. 8. 6.
[창작 시] 행복한 청소부 행복한 청소부 갑자기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잃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데 발 딛은 흔적조차 먹어치우고 길은 텅 빈 채 널브러져 있습니다. 어디가 미래를 향한 길인지 알 수 없어 몇 바퀴나 맴을 돌다 정신을 잃습니다. 허둥거리며 몇 걸음을 뗐을 뿐인데 몇 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앞을 향해 몇 걸음 나아갔던 모양입니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무엇을 하나 얻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은 수없이 많아 다 셀 수 없지만 새로 얻은 것은 하나뿐이어서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 당신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잃고, 오롯이 당신만 얻습니다. 통째로 다 잃어야 겨우 하나 얻는 것이 세상의 셈법인가요. 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사랑인가요. 오늘.. 2022. 7. 3.
[창작 시] 첼로 첼로 당신은 기쁨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가 두 사람을 위한 춤이었다가 깃털 같은 베개 위의 잠이었다가 침묵하는 사랑의 눈빛이었다가 비 오는 밤 낮은 노래 깊은 숨결이었네 죽음보다 느린 사흘이 지나고 당신은 알 수 없는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형체도 없이 불러도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네 무너지네 슬픔으로 끊어지는 현이 오장육부를 긁고 찢어놓았네 분노하는 폭풍이 휘몰아치다 떠나면 아픔이 더디게 수를 놓네 어린 시절 아버지 장례에서처럼 숨이 막혀 텅 빈 채 서 있네 어둠이 스멀스멀 몸 밖으로 흘러 나오네 게워내고 덜어내고 몸을 잊은 울림으로 만 고스란히 앉아 기다리네 당신 다시 오는 뒤꿈치를 든 소리 없는 당신 늘 다시 오는 꽃잎 열리는 음악을 2022.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