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우리는 바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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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 시] 우리는 바다로 갔다

by 브린니 2023. 4. 30.

우리는 바다로 갔다

 

 

우리는 언젠가 그곳으로 갔다

비가 오고 있었고

날씨가 맑았다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고

흐린 날의 시간들은 대체로 청명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는 재료 소진으로 입장할 수 없었고

갈매기가 앉은 테라스에 서서 바다를 향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우리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면 우리가 알고 있던 머릿속 바다가 풍경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한 남자와 함께 그곳으로 갔고

사람들은 여자의 남자를 알지 못했다

그 남자는 세상에서 지워진 남자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찍은 사진에는 바다가 한귀퉁이 들어와 있었다

여자의 치맛자락처럼 거대한 바다의 끄트머리 파도와 거품이 살짝 보였을 뿐이다

 

자동차 안에서 헨델의 피아노곡을 들었다

처음 듣는 곡이어서 반복해서 계속 들었다

천국과 이땅 사이 없는 장소에 들른 듯하다

음악처럼 생도 변주하고 오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노란 봄꽃 같은 드레스를 걸쳤고

남자는 사철 내내 입던 청바지를 입었다

두 사람은 간혹 미위할지라도 늘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고

그것이 두 사람에게도 신비였다

 

바다는 어떤 장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더 갈 수 없는 경계였고

위로이자 용서였으며 말하자면 사랑이었다

그곳에서 평온했다

 

주말이거나 그보다 짧은 시간 거기 머물렀으나

영원에 들었다 나는 시간 그들은

거듭 거듭 거듭났다

조금씩 더 비통한 현실에서 벗어낫으며

그만큼 더 일상에 안착했다

 

그들은 지금 지중해가 보이는 지붕 없는 카페 테라스에서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다

등 뒤에서 해가 내리쬣고 바다는 정지한 채 머물러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상상이든 꿈이든 주말 오후의 낯선 풍경이든

그 여자는 남자가 옆에 있어서 행복했다

남자의 큰 키와 까탈스런 성질과 경거망동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느 사내라도 그렇게 도덕적인 삶을 살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자의 분노는 최근 며칠까지 계속됐지만 한번도 남자를 떠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복수였고 역설적인 에로스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해가 질 때까지 머물렀다

바람이 세게 불자 추워졌고 바다가 출렁이며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멀리 바다 위에 놓은 다리에 불이 켜지고

서둘러 밤이 들이닥칠 모양이었다

 

생각에 잠기느라 마시지 못한 커피가 식어 있었다

바다는 세상의 밖에서 또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삶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우리가 그곳을 다녀갈 것을

알고 있을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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