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시] 신청곡을 연주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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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시] 신청곡을 연주해드립니다

by 브린니 2023. 5. 4.

신청곡을 연주해드립니다

                                -임현정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복지관 아이들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를 들으며 잠이 든다

아이들에겐 푸근하고 따뜻한 침대가 없다

다만 하루 동안 느낀 우울과 분노와 아픔을 내려놓고 드러누울 뿐이다

광고에 나오지 않는 메마른 메트리스 위로

 

복지사 J는 어둠 속에서 je te vuex를 듣는다

 

아이들은 사랑받을 줄 모른다

자신에게 사랑을 주려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며 달아날 뿐이다

 

변주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데

삶은 칙칙하고 좀스럽다

 

J는 생각한다

음악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음악이 위안이 된다는 사실이 가끔은 짜증이 난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삶은 눈곱만큼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다른 유트브 채널을 찾아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2악장을 듣는다

그토록 유쾌하게 천상의 소리를 들려주는 모차르트에게도

끝없이 하강하는 일으켜 세울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던가

 

생은 얼마나 까탈스러운가

마음이란 게 들러붙어 있기에 몸은 얼마나 무거운가

 

새소리 바람소리 공기의 움직임

사물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욕하고 악다구니치는 세상에서

음악은 세상의 소리를 정지시킨다

 

아이들이 잠든 뒤 음악은

오롯이 침묵의 소리를 들려준다

소리 너머, 없는 소리

추상이 구상을 지우는 소리

 

아이들은 꿈에서 음악 연주를 들을지도 모른다

기억에 없고 믿을 수 없는

신의 은총과 같은 천둥과 우레!

 

아침에 눈을 뜬 아이들은

떠들고 소리치고 울부짖지만

갑작스럽게

아이들의 소란이 음악으로 들린다

복지사 J는 음악이 자신을 현혹하는 것을 느낀다

 

음악은 지금

여기에 낯선 시간을 만든다

가까운 미래 아이들은 노래할 것이다

아픔을 아픔으로

우울과 슬픔과 한을

숨겨놓았던 마음의 소리를

 

음악은 삶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사람들의 침묵을 꺼내어 노래를 만든다

노래를 부르는 한

다시 살고 사랑할 수 있으리라

 

복지사 J는 소망한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삶 사이로

음악이 열어주는 구도의 길을

 

* 임현정 피아노 연주회 2023. 4. 9 평촌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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