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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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by 브린니 2020. 6. 6.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7절)

 

‘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 ‘자비’라는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인데, 이 ‘엘레오스’는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이 중에서 구약의 ‘헤세드’는 주인과 종, 친척들간의 관계 또는 하나님의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가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헤세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긍휼히 여기는 자’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 앞에서 “그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자”라고 다짐해봅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아 긍휼히 여길 만한 사람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그를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힘과 물질과 시간으로는 그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라나는 한 착한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에게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하고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다가 급기야 갈등이 커져 집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참 공부에 집중해야 할 나이에 집에서 나오게 된 아이는 돈을 벌기 위해 방과후 평일 저녁과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 앞에서 혼자 지낼 수 있는 고시원을 찾게 됩니다.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들은 착한 크리스천 고등학생은 친구와 함께 주민센터를 찾아가 지원을 받을 수 없는지 물어보고, 학교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들어가는 학교 기숙사에 비는 침대가 있으니 친구가 묵게 해줄 수 없냐고 여쭈어 봅니다.

 

하지만 주민센터에서는 아무리 이혼을 했다 해도 양 부모가 다 살아계시면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하고, 학교 선생님은 기숙사 입사 기준은 성적이라 딱한 사정은 알겠지만 묵게 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거절당하고 속상한 마음에 크리스천 고등학생은 이 이야기를 부모에게 털어놓습니다. 이 학생의 가정도 부유한 편은 아니라서 그 친구를 묵게 해줄 남는 방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한창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친구의 문제로 신경을 쓰며 주민센터에 가고, 선생님께 상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크리스천 부모답게 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방에서 친구와 함께 지낸다면 우리집에 와서 지내도 좋다. 아침밥은 먹여줄 수 있다.”

 

자녀는 고민을 합니다. 자기가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커지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공간을 내주기가 그리 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친구에게 자기 방을 같이 쓰자고 이야기합니다.

 

이쯤 되면 도움을 받는 친구도 마냥 속없이 좋다고 덥석 그러자고 하지 못합니다. 그저 친구라는 이유로 이 정도 신경써주고 도와준 것만으로도 미안하기 때문에 말해준 건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친구를 도우려는 노력은 결말을 맺습니다. 착한 크리스천 고등학생은 친구가 거절을 해준 것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막상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는 것는 불편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는 생각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누군가를 도우려 애쓰다보면 정말 나는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결국 이처럼 아무것도 도와준 것 없이 애쓰다 끝나고 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후 대학생이 된 이 크리스천 학생은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격증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그 친구는 그저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며 멋쩍게 웃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크리스천 학생은 이제 강의를 들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면서 잘 지내라고 전화통화를 마무리합니다. 아직 강의 들을 시간은 1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그 친구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더라도 그를 실제로 돕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마음에 찜찜한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이 우스워지기도 하고, 혼자 원맨쇼를 하다가 바보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누군가를 보며 긍휼히 여기려는 마음이 생겨도 ‘내 주제에 뭘’ 하면서 외면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아십니다. 우리의 자원이 부족하고 우리의 희생은 약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히 여기려는 지향성을 진심으로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조금은 마음에 괴로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기특하게 여기실지 모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참으로 다행하게도 혹은 참으로 고통스럽게도, 우리에게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긍휼을 베풀며 희생을 견뎌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격이 다듬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고난들이 있는데, 어쩌다가 그 고난이 그 사람에게 닥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고난을 당했을 때 겪어가야 할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고난을 몰고 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어린양처럼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긍휼히 여기려 애쓸 여지도 없이 살아가는 일 자체가 긍휼히 여기는 삶이 되어버립니다. 가족의 실수로 엄청난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질병으로 경제적, 정신적, 정서적 파탄에 이르기도 합니다.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키운 자녀가 엉뚱한 짓을 저질러서 미래가 막막해지는 어두운 길에 설 수도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며 함께 살아온 배우자가 자신을 속이고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삶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멀쩡하게 대기업에 잘 다니고 있던 남편이 출근길에, 밤새 술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던 사람에게 정면으로 충돌당하여 사지가 마비되어 꼼짝도 못하고 평생을 누워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삶은 인내와 견딤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먼저 이 고통 속에 처함 나를 긍휼히 여겨 나를 위해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절대로 분노와 절망 때문에 감정적으로 행동하다가 자신을 더한 어려움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고난 속에서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최대한 내가 침착하게 이 어려움을 견딤으로써 적어도 그들이 덜 힘들 수 있다면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삶을 살다보면 이 고난을 일으킨 사람마저 자연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음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십니다. 마음으로 용서할 수 없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그토록 힘들어도 그 고난의 삶을 견디며 함께 대가를 치르며 살아가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너는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아 목사로 키워낸 사실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도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았지만, 한 상에서 밥 먹는 것을 힘들어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은 살인범을 바라보면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을 예수님이 이해 못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안고도 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는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삶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긍휼히 여기는 삶’은 곧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나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의 긍휼히 여기는 삶도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로 하나님의 눈물이 떨어졌듯이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긍휼하신 눈물이 우리 삶 위로 촉촉한 은혜의 단비를 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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