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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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by 브린니 2020. 6. 15.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장 18절)

 

예수님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을 쓰실 때는 절대적 권위를 바탕으로 어떤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할 때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이라는 말은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모든 율법의 내용이 다 이루어질 거라는 단정적 선언입니다.

 

‘일점일획’에서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 중에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합니다.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킨다고도 하고,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작은 획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율법의 작은 붓 터치 하나까지도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그 율법의 말씀이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거라는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이 율법의 권위와 효력이 계속될 완전한 것임을 인정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구절에 대해 의문점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을 범하셨고, 음식에 관한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으셨으며, 이혼에 대해서도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 이룰 거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은 단 한 가지뿐인 것 같습니다. 율법의 문자적 보존이라기보다는 그 율법이 의도하는 바를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한다는 것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성취된다기보다는 그 율법이 의도한 일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에는 노예에 관한 규정들이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 그 누구도 노예가 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의도하셨다고 믿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에서 비록 노예일지라도 인간답게 대하기를 원하셨던 의도를 우리가 성취해 나갔기에 오늘날 노예 제도를 폐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문자 그대로를 따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하려 애써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한꺼번에 없애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가슴 아픈 노예제도를 보시고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말씀을 주셨다고 볼 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시려고 직접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처럼 율법의 근본정신을 알고 이루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율법의 근본정신은 죄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대속하는 삶을 사는 것이 본래 의도하신 가장 아름다운 낙원을 만들어가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의 삶은 서로를 위해 대속하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아담은 범죄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지어주신 여인 때문에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책임 전가를 하여 자기 죄를 변명했지만,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여인의 죄를 자신의 죄로 인정하고 대신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고 비겁하게 죄를 변명하고 전가하여 결국 타락한 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추악한 비겁함과 타인을 정죄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하나하나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세부적인 것들조차 지키지 않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고, 지킨다 해도 그저 문자적으로 겉으로만 따랐을 뿐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깨닫지도 못하여 오히려 겉으로는 지키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전혀 지키지 않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이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이전의 하나님의 근본 의도였던 죄의 근원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율법의 완성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대속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단 하루도 어겨서는 안 된다든가, 먹지 말라는 것을 절대로 먹지 않는 것이 율법의 존재 이유가 아닙니다.

 

율법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인간의 모습, 선하고 아름다웠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본래 목적과 의도를 잃은 율법은 우리를 얽매고 옥죄거나 우리를 오만하게 하고 회칠한 무덤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 대속하는 삶, 타인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을 쓰기보다, 타인의 죄를 대속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이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다 완성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런 삶을 산다면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우리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 아픈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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