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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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by 브린니 2020. 6. 18.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으니라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집니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나 약혼자를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의 원형은 ‘에피뒤메오’로 ‘갈망하다, 욕망하다’의 뜻인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의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목적의 의미를 가지며,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의미상의 주어 기능을 하므로,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신학자 카슨Carson은 말하였습니다.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단순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하려고 남자가 구애의 눈빛을 보내는 액션을 취한다는 뜻이 됩니다.

 

파키스탄이나 인도의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계속 뚫어지게 그 여자를 바라보는 특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좀 더 오래 바라볼지 몰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오랜 시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느 나라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 바라봄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음욕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라봄의 현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눈빛만을 보낸다는 것뿐 아니라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SNS 등으로 미묘하게 여지를 주는 등의 액션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요즘은 ‘썸’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남녀간에 미묘한 감정이 흐르는 것을 ‘썸 탄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상대방과 은근히 썸 타는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마음이 쏠리게 하는 것을 이 말씀처럼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솔로인 남녀에게는 이런 일이 매우 정상적이고 로맨틱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이 말씀처럼 배우자가 있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절도’이며 ‘간음’이 됩니다.

 

또한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솔로인 사람에게 이런 일을 행하는 것 역시 자기 배우자를 속이는 일이 되므로 ‘거짓’과 ‘간음’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충동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로도 이미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을 바라봄으로 어떤 눈빛을 보내고 상대방도 그 눈빛에 반응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이미 간음인 것입니다.

 

마음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매우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품은 생각이 상대방에게 전해지고 반응하기를 바라며 바라보는 것이 간음이라고 하면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뛰어난 사람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외모가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 지성이 아름다울 수도 있으며, 그 기개가, 그 용기가, 그 기백이, 그 결정이, 그 목소리가, 그 날쌘 운동신경이, 그 끈질긴 노력이, 그 강한 정신력이, 그 아름다운 희생이, 그 지치지 않는 소망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탄복하게 합니다.

 

누군가의 어떤 모습을 보며 우리가 감탄하고 사랑스러움을 느낄 때, 그것을 간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감탄은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감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보고 하나님처럼 마음껏 보기에 참 좋다고 감탄하는 것은 뛰어난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서 느끼는 매력과 사랑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간음이 되지 않는 길은 이 말씀처럼 상대방에게 여지를 주는 바라봄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이란 욕심내지 않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주고 칭찬해주고 감탄해마지 않으며 보기에 참 좋다고 하나님처럼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은 간음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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