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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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by 브린니 2020. 6. 20.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43절~48절)

 

구약성경에는 실제로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레위기 19장 33~34절을 보면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태도에 대한 강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남은 자들이라고 믿고,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해서 차별적 태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음 구절들의 이해가 쉬워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던 로마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해를 비추고 계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에게 동일하게 해와 비를 주신다고 해서 그들을 심판 없이 다 구원하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시대적으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그리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신학자 Plummer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원래 의도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며 삽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낱말의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하여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의 사랑을 잘 살펴보면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 Broadus는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내 친구는 내 삶의 일부이고 내가 좋아하는 존재이므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족과 연인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결국 자기 감정에 의한 자기 좋은 것이 되니 이기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수준은 그 정도에 멈추지 않습니다. 신학자 Scott는 “타락한 옛 인간의 삶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삶을 예수님은 ‘온전한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할 때 ‘온전’은 바로 ‘사랑의 온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가족을 위해 애써 일하고, 집안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감당하고, 어떤 일로 상한 가족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 수준의 사랑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때리고 모욕하는 이들에 대해서 하늘을 바라보시며 “저들은 저들의 죄를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하여 악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저 무지하다고 할 수는 없는 가롯 유다에게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저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배신하여 무지한 이들에게 넘겨주어 욕을 당하게 할 원수에게 하시는 이 말씀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참으로 안타까워하십니다. 누구나 태어나지만 저렇게 악한 일을 행하는 인생을 살다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해 좋았을 거라는 그 참담한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떡 그릇에 손을 넣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원수에게 떡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할 일을 하라”

 

그가 할 일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일임을 아시는 예수님이 그에게 먹고 힘을 낼 떡을 주시고, 네가 결정한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유다가 내려야 할 결정은 그 결정이 아니었다는 이중적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태도는, 물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아시기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지만, 우리는 이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이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갓 출감한 장발장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그 눈앞에 값비싼 은촛대가 놓여 있는 것도 치우지 않은 신부는, 장발장이 은촛대를 훔쳤다가 잡혀 왔을 때, 자신이 그것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한 마디로 장발장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지요.

 

예수님과 신부의 태도를 보면, 우선은 원수를 동일하게 먹입니다. 그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식탁에 앉아서 먹도록 허락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와 함께 있어줍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면서도 그들 결정의 자유의지까지도 존중합니다. 그들 스스로 옳은 행동을 하기를 바라지만,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모욕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배웁니다. 그가 바른 행동을 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그의 삶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되, 내가 모든 타인에게 하듯이 동일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예수님처럼 참으로 초연하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내 성품을 신의 성품으로 빚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 분노의 감정보다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 교부인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창조하기 위하심이었단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채찍에 살을 뜯기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여, 내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창조해 달라고 나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 내 감정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이 신의 성품으로 빚어지는 길이며, 이같이 한즉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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