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6장 9절~13절)
기도는 너무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기도를 노동이라고 하고, 누구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책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어떻게 하는 게 정말 기도일까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거룩’이 뭘까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 자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성격이 어떠냐고 할 때 성격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과 성격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거룩’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거룩히 여기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 안에도 거룩함이 있어 그 본 모습대로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히 여김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미 타락하여 그 순수한 거룩을 잃었기에 하나님을 거룩히 여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거룩’이 과연 뭘까 생각해봐도 잘 잡히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거룩히 여길 수 있는 그날은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거룩을 흠모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는 그 거룩함에 대해서 경외하고 사모하며, 거룩한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고 싶다는 마음의 그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아시기에 그런 갈망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미 천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다”라고 하신 말씀과 상치되는 것 같지만, 이미 오신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에 그 나라가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우리의 염원을 기도에 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는 ‘델레마’로 인간을 구속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그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완성되었으니, 이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순전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인류의 회개는 진행 중이며 그 완성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1세기 예수님 당시에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받아서 생활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가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에게는 이 기도는 참으로 절박한 간구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두 달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했을 때 수많은 자영업자가 도산하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어진 것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고급 아파트와 외제 승용차가 즐비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한 달 한 달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급료가 한 달 월급으로 변했을 뿐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 기도가 매우 유효합니다.
이 기도를 기억한다면 자본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일용직들의 힘겨운 삶에 대해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재산을 많이 갖고 있는 이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구원의 길을 열어줍니다.
또 하나님께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간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일할 수 있는데도 힘든 일, 지저분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굶지 않고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차라리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게 훨씬 정직하고 겸손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고 기만입니다.
이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씀 안에는 하루 일해 하루 먹는다는 노동자의 삶이 들어있고,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며, 그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 있다는 원리가 작동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말씀에는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하나님도 용서해 주시는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가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가 크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끼치는 해를 상대적으로 작게 여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실제보다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작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의 겸손한 마음 상태를 나타내주는 말씀이며,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끝까지 외면하고 상대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감정적으로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어도, 그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그럴 때 분노의 감정은 점차 가라앉게 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에서 ‘시험(temptation)’은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이라는 뜻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시험을 이겨낼 수 있어, 라고 자신만만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깊아 자각하지 못한 사람의 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실 정도로 시험은 아무리 강한 사람에게라도 오는 것이며, 인간이라면 그 앞에서 누구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운명처럼 다가오는 시험들을 경험합니다. 이제 다 되었다 싶을 만큼 행복한 순간에 문득 질병과 실업과 배신과 천재지변이 다가옵니다. 욥의 경우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달라고 겸손하게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은 우리의 의지로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씀에서 ‘다만’은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 접속사로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간구입니다.
반드시 악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반드시 구해달라는 이 간구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던 야곱의 기도처럼 능동적인 것입니다.
에서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처럼, 우리는 사단의 공격 앞에서 무력하므로 반드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야겠습니다.
정리하면, 거룩함을 모르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향한 사모함과 그 거룩함으로 지으셨던 본래의 우리 모습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거룩한 나라가 완성될 그 나라를 사랑하며,
우리를 그 나라에 데려가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모든 이들이 알게 되기를 희망하며, 오늘 하루 먹기 위해 애써야 하는 우리 삶을 불쌍히 여기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간구하되 이미 넉넉히 먹을 것이 있는 이들 역시 이 기도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나누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면 그 어떤 죄를 저지른 사람도 회개한다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거라는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그를 맡김으로 분노를 가라앉히며, 자신이 시험 앞에서 연약한 자라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악에서 구해달라고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 살펴보니, 그 모든 내용 속에는 거룩함을 모르는 나 자신의 죄인됨과 죄 많은 타인도 역시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과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존재이며, 언제 어떤 천재지변으로 시험당할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오늘도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되심을 다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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