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이 말씀은 흔히 예수님의 황금률이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최고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마이너 신학자와 시골에서 노인요양원을 경영하고 있는 목사, 신학대학 은퇴 교수, 교회 중직으로 오래 봉사해온 사람들, 시골 마을에서 공동체를 꾸려가며 살아가는 신앙인 등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된 소모임에서 한 자매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신학대학의 은퇴 교수가 대뜸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말이죠.”
매우 정답 같은 대답이면서도 뭔가 요점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 때문에 그 말에 대해서 한참 생각을 하느라 이후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원문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적극성을 띄는 도덕률이라고 합니다.
첫째, 인본주의적 세상 도덕에서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치 말아라” 정도여서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이지만, 이 말씀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라는 것이니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도덕입니다.
둘째, ‘남들이 나에게 해준 것처럼’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이니 그가 나에게 선을 행했건 말건 내가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의미에서 적극적인 도덕입니다.
하지만 은퇴한 노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과연 그런가 하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현 시대의 흐름 때문인 것 같습니다.
1인 가정과 이혼 가정이 급격히 늘어나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누군가가 대접받기를 바라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다가와 뭔가를 해주려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롭게 그냥 좀 내버려둬 달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내가 너한테 무엇을 해주랴?”하고 물어보니 며느리는 “우리집에 오지 마세요. 그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인간관계의 불편함과 거북함을 싫어하고, 서로 맞춰가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인도에서처럼 완전히 혼자 살 수는 없으니, 어쩌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간관계는 평소에는 귀찮게 안 하고 조용히 있어주다가, 필요할 때 나타나 척 도와주고 또 소리도 없이 사라져주는 알라딘의 램프 속 지니와 같은 존재를 제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친구들을 몇 명 두고 SNS로 가끔씩 소통하다가 외로울 때 한번씩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혼자 사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는 인간관계가 가장 쿨하고 산뜻하고 깔끔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가는 오히려 “나에게 뭘 원하느냐”는 날카로운 눈빛에 놀라기 십상입니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오해받기 딱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크하고 세련된 관계를 선호하는 이들도 역시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을 때가 오곤 합니다.
그렇게 건강했던 몸에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그런 삶을 지탱해 주던 경제적 기반인 직장을 잃게 되기도 하고, 떨어져 살던 가족 중 일원에게 문제가 생겨 엮이기 싫은 문제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누군가 필요합니다. 마치 끝이 안 보이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괜찮은 척, 여전히 아무 문제 없는 척, 잘 사는 척 SNS에 멋진 모습을 남길 수는 없는, 그런 절망의 시간이 다가오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 받을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죄가 드러나 모든 사회적 삶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비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함께 고통을 나눌 사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누구나 그 상황이라면 그런 대접을 받고 싶을 것입니다.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한때 다른 사람들을 귀찮아하고 마치 자기 혼자 충분한 듯 안하무인의 태도로 살아갔다면, 이때 옆에 아무도 있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는 적극적 도덕에 입각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내가 그 상황이라면 대접받고 싶은 대로 그에게 대접해야 할 것입니다.
내게 미운 짓을 해서 전혀 잘해주고 싶지 않아도, 그가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면,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고 그것이 선지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왜 붙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못된 짓을 했어도 예수님이 필요한 모든 인류에게 그 필요를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삶을 본받아 오늘도 냉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누군가가 갑작스러운 어려움으로 나를 찾을 때, 기꺼이 그 부름에 환하게 달려가 줄 수 있는 그런 선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럴 수 있도록 은혜를 부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오늘 하루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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