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8장 5절~13절)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기독교인보다 더 따뜻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지 않았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도 예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백부장 역시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버나움 지역은 군사적으로 중요해서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군대는 비유대인들 즉, 사마리아나 레바논, 시리아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이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가버나움은 헤롯의 관할지였기에 수하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백부장은 헤롯의 용병으로 중급 지휘관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누가복음(7장 2절~10절)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백부장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되는 게 이 백부장은 자기 가족이나 친척이 아니라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나와서 간구하고 있으니 평소 이 백부장이 어떤 인품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체면이나 자기 할 일보다 부하의 병 낫기를 간구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백부장의 자상한 인간성은 이미 예수님의 성품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세리였던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가서 묵어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방인 백부장의 집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이나 세리, 이방인에게 더 친밀하고 따뜻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백부장의 성품이 한데 어우러져 보기에 참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감당치 못하다’라는 말은 ‘우크 하키노스’로 영적, 도덕적으로 몹시 결여되어 권위있는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이 무가치함을 느낄 때 쓰는 말입니다.
백부장은 단지 성품이 자상하고 훌륭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수준을 넘어서 영적으로도 깊은 깨달음이 있어 절대적으로 거룩하며 초월적인 존재인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참으로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어려서부터 구약을 달달 외우며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이처럼 깊은 영적 깨달음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의인이라고 부르셨던 욥의 경우를 보아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에돔 지역의 족장으로서 계시가 충분하지 않은 초기 족장시대에 이미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의인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17장 24절부터 27절에서 하나님이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주와 만물과 모든 생명의 호흡들을 바라보면서 더듬더듬 더듬어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았어도, 태어나 유아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라고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이 모진 세상 속에서 고통 받으며 살면서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고 울며불며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가 문득 한줄기 빛을 발견하여 궁극의 창조자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몇 가지 경건생활의 규례를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일성수와 헌금, 예배와 봉사 등의 행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님마저 기이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능력있는 종교지도자나 치유의 은사가 강력한 의사로 보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하인에게 안수기도를 해주거나 치료를 해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말씀만 하시면 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적 통치자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보고 있기에 예수님의 한 마디면 눈에 보이는 세계의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의 깨달음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들으시고 기이하게 여기셨는데, 이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로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들이 참 기이하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이토록 깊은 믿음을 지녀서 기이하고, 정작 예수님의 고향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고 병자를 고쳐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기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이 예수를 메시아로 계시하는 구약을 거의 알지 못함에도 그 당시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더 깊이 깨달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즉,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바로 백부장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이 멸망의 장소에 쫓겨나 이를 갈며 울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말하며 ‘이를 간다’는 것은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절망을 말합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깊은 바다 속에 잠긴 것 같은 절망을 느낄 거라는 이 말씀은 단지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의 중직이나 목회자의 길을 걷다가 얼토당토않은 죄를 저질러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우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저 문자적인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가는 진짜로 어두운 곳에서 울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이미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아이신 것과 초월적 존재로서 세상과 우주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아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믿음은 옳은 것이었고, 그가 믿은 것은 옳기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리 그대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찬양 인도도 하고 해외에 단기 선교도 다녀오는 등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젊은 남자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지인이 병원에 입원하였기에 정말 나을 거라고 믿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런데 낫질 않아 왜 말씀대로 했는데 안 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믿고 기도하면 믿는 대로 다 될까요? 수많은 기독교인 수험생들은 믿고 기도하는데 왜 시험에 떨어질까요? 수많은 기독교인 환자들이 믿고 기도하는데 왜 낫질 않을까요? 수많은 기독교인 사업가들이 믿고 기도하는데 왜 사업이 번창하지 않을까요?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의 이루어짐은 먼저 영적 차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서 시작하고, 그 깨달음이 백부장의 성품을 주변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것으로 다듬었으며, 그 성품대로 행하여 가장 낮은 자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그를 위하여 간구하되 자신이 도무지 예수님을 감당키 어려울 만큼 비천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깊어졌으며,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을 하시기까지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완전함 맡김에 이르기까지 겸손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고로 아까 간절히 믿고 기도하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도했는데 왜 안 낫는지 물었던 젊은 남성은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결혼 생활 내내 외도를 멈추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가 예수님의 본질을 깨닫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까지 믿음을 가졌으며 자신을 무가치한 자로 여길 만큼 낮아지고 겸손했는지 질문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병 나음, 오늘의 문제 해결은 단지 그 사건 하나에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전 존재로, 전 인격으로, 전 삶으로, 얼마나 궁극의 존재를 찾아헤매고 있는지, 그리하여 존재의 근원이며 우주의 창조자이며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았는지,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몸을 찢을 만큼 뜨거운 사랑의 약속을 실행하셨다는 사실이 내 삶을 꽉 쥐는 닻이 되어주는지, 순전한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눈을 떴으니 또 하루를 사는 게 아닙니다.
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예수님의 입김과 손길과 피가 뚝뚝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보였으면 합니다. 그분 때문에 사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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