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태복음 9장 1절~8절)
우리의 질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죄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부주의 때문에 세균에 감염된 거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인류의 타락 이래 발생한 질병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므로 개인의 죄나 신앙 정도와는 연관 짓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은 ‘죄 사함’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에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 예수님은, 예수님께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시어 메시아로서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은 확실하며, 동시에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질병과 죄의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먼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칼빈(Calvin)은 이 부분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칼빈의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의 정도 또한 내가 알 수 없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믿음을 진짜로 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먼저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 완료의 뜻이 강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 이미 용서가 실현되었음을 뜻합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이 중풍병자의 경우는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죄악에 빠져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중풍병에 걸렸으며, 자신이 범한 죄악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용서해주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사함의 선포 이전에 “작은 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그의 마음속 두려움까지 애틋하게 만져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죄 사함 선포는 질병의 치유뿐 아니라 질병의 원인까지 제거하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죄에 빠졌던 사람은 자신의 죄에 얽매여 있어서 교회에서 아무리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받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해도 또 생활 속에서 얼마 안 가 다시 죄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쉽게 말해 “은혜가 떨어졌다”면서 또다시 부흥회나 집회를 찾아 다시 또 회개하고 눈물 흘린 후 생활로 돌아와서는 또 죄 짓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죄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어 많은 것을 잃은 사람도 오랫동안 은혜 받았다 은혜 떨어졌다를 반복했던 경험 때문에 여전히 자신의 죄를 자기가 끊을 수 있는지 스스로 믿지 못하여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예수님은 “소자야 안심하라”고 말씀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완료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료 형태로 말씀하셨는데, 삶 속에서 여전히 죄가 진행되고 있다면 그 선포를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기관이란 예루살렘 중앙 성전이나 회당에 속하여 율법을 필사하고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만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으므로 당연히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적 발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아셨듯이 서기관들의 마음 또한 꿰뚫어보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악한 생각이란, 바로 자기들 눈앞에서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시는데도 그 이적과 함께 주어지는 ‘죄 사함’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하고 성실하게 알아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자기들의 도그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어긋나면 트집부터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틀에 박힌 도그마가 더 강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조건 이상하다고 여기고 신성모독이나 이단으로 치부하려고 트집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정말 성경에 비추어 보아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신성에 맞는 일인지 진정성 있게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진정성 있는 태도는 자기 자신의 믿음에도 해당됩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그 선하심을 추구하며 내 삶을 온전하게 가꾸려는 마음으로 애쓰고 은혜를 구하고 있는지 성실하게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은 서기관들에게 ‘악한 생각을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악하다’는 표현을 말입니다. 우리는 ‘악하다’는 표현을 실제로 눈에 띄게 혐오스럽고 좋지 않은 것에 붙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도그마를 넘지 못하는 틀에 갇힌 생각을 보고도 악한 생각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막고, 마치 자기가 바른 신앙 속에 거하는 양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바른 신앙이란 딱딱한 고체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닮아 언제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늘 움직이며 새로워지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제 우리가 바른 신앙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 바른 신앙이란 끊임없이 탐구하고 실천하며 사모하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다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가야만 완성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이 완성된 것이 아님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과 병 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무슨 말이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명백한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시는 것이며, 병 고침이야 뛰어난 의사나 치유 능력이 있는 선지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병이 나았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더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 즉 죄 사함부터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딱딱한 머릿속 신앙의 틀을 호두껍질 깨듯이 깨야만 하셨습니다.
죄 사함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특권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사명이기도 했습니다. 죄 사함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예수님처럼 타인의 죄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봅니다. 중풍병자처럼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 병들고 버려지고 사회적으로 살아갈 바탕이 없는 사람 곁에서 가족을 지키고 자녀를 키우며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죄 지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해서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슬퍼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겠지만, 예수님이 함께하시며 그 삶을 위로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중풍병자가 일어나 침상을 들었다는 것이 초점이었다면 이제는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 더 인상적입니다.
중풍병자의 집은 어떨까요? 아마도 오랫동안 병들어 누운 병자를 수발하느라 온 가족이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피폐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가 누운 침상을 들고 온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버려지거나 외면당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병이 다 나은 후 그는 진심으로 집을 돌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 몸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다 망가지고 여러 사람이 힘들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제부터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건강한 육체뿐 아니라 완전한 죄 사함을 받았고, 건강한 영혼도 선물받았으니, 이제 그의 집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는 이제부터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아까 다시 죄에 빠지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죄 사함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부분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에 빠져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삶을 삽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쾌락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가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위한 감사와 사랑을 가슴속에 깊이 품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의 선포를 참된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겸손한 자세로 사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전히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된 사람은 예수님의 죄 사함 선포를 쉽게 손에서 떨어뜨리는 것 같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통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죄에 빠지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인 가족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자신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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