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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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by 브린니 2020. 7. 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마태복음 9장 27절~31절)

 

신약성경에는 맹인들이 여럿 나옵니다. 팔레스틴 지방의 특성상 동쪽으로부터 극심한 모래 바람이 불고, 위에는 수분이 부족하므로 석회석의 먼지가 많아 맹인과 눈병 환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말씀에도 맹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선지자인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실 일어날 일을 예언하면서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 것이며”(이사야 5:5)라고 말하였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라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자신이 메시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선함이 없음을 알기에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선함도 공적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 신앙에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배우고 자라난 우리는 문득 성경을 앞에 두고 우리가 무가치하고 선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제대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맹인처럼 사회적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스스로도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쉽게 무릎을 꿇을 있고,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주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기보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가기가 쉬운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그날 하나님이 숨을 거두어가실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그리 가볍고 작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니 말입니다.

 

맹인들이 이렇게 부르짖는데도 예수님은 거리에서는 그들에게 답변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집은 마태의 집이거나 가버나움의 거처나 베드로의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할 있습니다.

 

거리에서 그들에게 이적을 행하셨다가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맹인들에게내가 능히 줄을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말의 핵심은 일을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내가 있습니다. 내가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맹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권위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불교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있어서 원효가 백성들에게 단지 마음으로 믿어나무아미타불 외워도 부처의 자비로 극락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시켜 신라에 대승불교가 퍼졌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도 너무 단순하게만 전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맹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가 오시는데 때는 눈먼 자도 보이고 귀가 들리는 자도 들리게 된다는 식으로 매우 단순하게 말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여 예수님처럼 다른 이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는 삶을 살게 거라는 것은 모른 채, 예수님을 믿으면 받고 구원받고 범사에 형통하게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맹인에게, 우리에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지, 그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흘리는 왕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까요?

 

물론 그분은 능력의 주이시므로 맹인의 눈을 밝게 하셨습니다. 그럼 맹인이 밝아진 눈으로 이제 어떤 삶을 살기를 예수님이 원하실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따라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왕의 옆자리에 앉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예수 믿고 받아 부를 누리거나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에게 어떤 축복이 임했고, 그들의 사명은 무엇인지 우리는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각오해야지, 그들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거나 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원치는 않으실 거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말씀에서 맹인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기고 땅에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권능을 믿었고, 믿음의 분량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는 사랑으로 허락해주셔서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에 응답을 받은 환희에 가득차서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를 받게 되고,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알지 못한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은 이렇게 완전하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는 이렇게 예수님을 방해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믿음의 기적적인 응답에 대해 스스로 도취하여 기뻐 날뜁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은 믿음도 응답도 기적도 아닌 같습니다. 오직 예수님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아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응답받아야 일들이 많고, 때문에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맹인들의 경우처럼 자꾸 과녁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기를 원하는 열망이 가장 중요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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