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마태복음 8장 28절~34절)
한여름인데도 습도가 높지 않아 쨍 하니 살 만한 날씨입니다. 오늘도 힘을 내어 묵상의 세계로 들어가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도 참 극적이고 판타지 영화 같은 장면이 떠오르는 부분입니다.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보면 악한 영들과 날개 달린 아름다운 요정 전사들 사이의 전쟁을 볼 수 있고, 지옥을 연상시키는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고 혐오감을 주는 귀신 혹은 괴물 같은 군대가 끝도 없이 기어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런 그로테스크한 영의 세계 속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이 말씀은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으스스한 느낌을 줍니다.
우선 이 말씀에 나오는 가다라 지방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곳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음식으로 여겨 기르거나 먹지 않았는데, 이 말씀에는 많은 돼지 떼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무덤 사이에 귀신들린 자가 거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는 정신적 문제나 자폐증 등의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에 놓인 사람입니다.
이단 사이비들이 하는 것을 보면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자폐증, 정신지체 등의 증상을 가진 사람을 치유한답시고 귀신을 내어쫓는 축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씀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는 그런 종류의 증상이 아니고 악한 영의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치유가 어려운 환자라고 해서 귀신 들림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시의 무덤은 석회암으로 이뤄진 언덕의 어둡고 음산한 동굴 속이라서 귀신 들린 자에게는 거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군대 귀신이 들려 있어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몹시 힘이 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오자 귀신들이 소리를 질러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부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진리를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 귀신들은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님을 알되 자기들과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합니까?”라는 뜻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잘 알아도 예수님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수님을 잘 몰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예수님과 공동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존재이기에 예수님과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막강한 귀신의 힘 앞에 약한 존재라 해도 예수님 앞에 더 소중하므로 보호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는 이 땅에서 귀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귀신들의 활동을,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지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는지를 찬찬히 살펴봅시다.
귀신들은 아직 자기들에게 활동할 권한이 있지만,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복종해야 함을 알기에 자기들을 쫓아내려면 저기 보이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그 돼지 떼는 약 이천 마리나 되었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그 지방 사람들의 재산인 돼지 떼들을 몰살시킴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종종 난폭한 행위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신학자 Plummer와 Weiss 등은 예수님이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들에게 그 사람에서 나와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이지 돼지 떼에게 들어가라로 허락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돼지 떼가 몰살한 것은 예수님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 다른 신학자 Hendriksen는 아직 마지막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에게도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일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다른 신학자 Rosenmuler는 예수님께서 그곳 사람들에게 이 귀신들린 사람의 가치가 돼지 이천 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허락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해석을 따를지는 개인의 몫이겠지만, 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은 마귀의 권세를 사용하시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는 데 사용하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욥을 두고 하나님과 마귀가 어떻게 대화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욥을 시험하고자 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으며, 그 과정을 통해서 욥은 울부짖고 고통받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들어서 알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보아 압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의인으로 살았어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고난을 통해서 대면하여 알게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를 통해 저 무시무시한 마귀의 능력과 권한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을 경우에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앞에는 늘 선악과가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마귀의 속삭임도 여전히 진행중인 것입니다. 그 속삭임은 달콤한 유혹이기도 하지만 절망적인 고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하기도 하지만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달콤한 선악과를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가 때로는 고난이라는 피흘림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마귀가 머리가 밟힌 채로 피를 흘리면서 나타나 “나는 너의 고통을 알아, 그 고통은 하나님이 허락한 거잖아. 너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차라리 하나님을 버리고 내 손을 잡아.”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미는 경험을 한다면 그것 역시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시험과 같은 것이 됩니다.
이 말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고, 분노의 질주를 하게 하여 이천 마리를 몰살시킵니다.
요즘 돼지 한 마리의 가격이 약 30만원이라고 하니 이천 마리면 약 6억 원 어치에 해당합니다.
예수님한테는 귀신 들린 자가 천하보다 더 소중하기에 돼지 이천 마리의 희생이 크지 않지만, 돼지를 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엄청난 재산이기에 그 희생을 감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들에게서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무덤가에서 사는 귀신 들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대가가 따랐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 예수님이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귀신들을 물리쳐 귀한 생명을 살린 예수님의 기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재산을 잃게 한 고난이요 재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 앞에 져서 마귀의 책동대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떠나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이 우리 삶에 일어나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선한 기적이 일어나면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더 견고해지고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지며 윤택해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반대로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대가와 희생을 치르는 일이 될 수 있으며, 그때 우리는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견뎌야 하며, 그로 인해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자녀로 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예수님과 닮아 있는지를 보아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라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네가 내 아들이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우리 삶을 이끌어가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을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 생명을 위하여 돼지 이천 마리의 희생을 각오하는 삶! 그 피눈물 나는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는, 혹은 살아가야 할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위로와 사랑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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