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발리스 <푸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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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노발리스 <푸른 꽃>

by 브린니 2020. 6. 11.

푸른 꽃은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는 그리움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불태워줄 연인이 푸른 꽃으로 꿈속에 피어날 것입니다. 회사 일에 지친 직장인들은 못 다 이룬 젊은 날의 파릇한 꿈이 푸른 꽃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빚에 쫓겨 허덕이는 사람은 1등 번호를 담은 로또 한 장이 가슴속에서 꺾을 수 없는 푸른 꽃으로 피어있을지 모릅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노발리스의 가슴속에 푸른 꽃으로 핀 것을 무엇일지,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재미난 추리소설도 아니고, 흥미있는 스토리가 펼쳐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것도 아닌데, 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읽는 이의 마음에도 안개 속 희망처럼 피어있는 그리움의 푸른 꽃 때문입니다.

 

관념론으로 가득한 독일 지성의 한 사람인 노발리스의 그리운 푸른 꽃은 현란한 형이상학의 용어로만 표현될 것 같다가도 여리고 아름다운 한 여인의 잡힐 듯 그리운 육체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노발리스의 본명은 게오르크 필립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인데,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자’라는 뜻의 라틴어 '노발리스'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그가 그리워하는 그 무엇은 이 땅에 있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노발리스는 연인 소피 폰 퀸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감정에 눈을 떠서 그리움의 수준이 이 땅이 아닌 곳으로까지 상승하게 되어, 그의 시공을 넘나드는 그리움의 노래가 이 <푸른 꽃>이라는 작품에 담기게 됩니다.

 

29살에 요절한 노발리스의 삶조차 그의 시가 찾아 헤맨 것을 마치 이 땅에서 찾을 수 없기에 훌훌 떠난다는 듯이 느껴집니다. <푸른 꽃>은 그의 작품이자 그의 삶으로 읽혀집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튀링겐 백작 가문의 하인리히는 낯선 나그네에게 성 요한절 밤에 피는 ‘푸른 꽃’의 전설을 들은 후, 꿈에서 그 푸른 꽃을 찾게 됩니다. 그 꽃 속에 나타난 한 소녀의 모습을 동경하다가 아우크스부르크로 여행을 떠나 여행길에 상인들과 기사들, 광부들이 들려주는 신비로운 이야기와 노래를 전해 들으며 푸른 꽃을 더욱 찾고 싶어합니다.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한 하인리히는 외할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클링스오르와 그의 딸인 마틸데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데, 이때 하인리히는 푸른 꽃의 꿈에서 본 소녀가 바로 마틸데였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마치 노발리스 자신의 연인이 죽은 것처럼 하인리히의 연인 마틸데는 죽게 되고, 그 죽음에 절망해 하인리히는 순례를 떠납니다.

 

하인리히는 시인 클링스오르의 제자가 되는데, 그의 딸 마틸데에 대해서 노발리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녀는 그녀 아버지의 정신이 예쁘게 변장한 것 같았다.”

 

마틸데는 그저 한 여인이 아닙니다. 하인리히, 즉 노발리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스승의 정신이 의인화된 것과 같습니다. 그의 사랑은 여인에 대한 사랑 이전에 위대한 정신에 대한 사랑이며, 그의 사랑은 형이상학에 대한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오! 그녀는 인간의 몸을 하고 나타난 노래의 정신이야!”

 

그의 사랑하는 여인은 정신의 노래이며, 신의 노래입니다. 서양사상에서 위대한 정신과 구원의 빛이 한 여인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닙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가장 높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여인으로 성스러운 베아트리체를 등장시킵니다. 헤르만 헤세 역시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타락에 빠져 있다가 산책로에서 만난 한 여인을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붙이고 그리워하면서 타락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자를 타락의 길에서 구원하는 지혜의 여신 소피아는 어떤 경우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모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 베아트리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인리히에게 마틸데는 위대한 정신이요, 지혜의 여신인 소피아이면서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 베아트리체입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청년 때의 에로스적 정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대한 지성을 사랑하는 지적 사랑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그의 사랑의 고백을 읽어봅시다.

 

“너를 통해 하느님은 내게 당신의 뜻을 알리고, 너를 통해 그분은 내게 충만한 사랑을 주시는 거야.”

 

영원한 소망의 궁극인 푸른 꽃 속에서 그녀를 발견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의 한계는 유한한 육체를 지닌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한 단계 더 도약합니다. 그는 이제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그 사랑을 간직한 채 이 땅의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고통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그에겐 죽음도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의 한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금세 사라지는 자신의 존재도 어린애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세상을 잃은 다음에야, 그리고 그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어 세상의 넓고 화려한 홀을 아직은 좀 더 거닐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은 그에게 소중해졌다.”

 

정신과 영혼과 사랑을 종합한 푸른 꽃의 본체가 인간이 되어 나타난 것과 같았던 마틸데의 죽음으로 그는 이제 죽음을 삶의 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넘어서 이 세상의 삶을 하나의 홀(Hall)로 바라보며 그곳을 좀 더 거닐어야하는 쓸쓸함을 견디며 서늘한 소중함을 느낍니다.

 

마틸데를 가졌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화려한 자긍심으로 가득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면, 이제 마틸데를 잃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에야 죽음 뒤에서 삶을 바라보게 되고 비로소 삶의 서늘한 슬픔을 가슴에 담은 원숙한 소중함을 품게 됩니다.

 

하인리히는 이제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공포와 고통, 결핍과 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날은 언제인가요?”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겸손하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을 통해 그는 단지 연인의 죽음을 넘어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스승은 대답합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힘만 존재하게 되는 날이지. 양심의 힘 말이야. 그리고 자연이 겸손하고 도덕적이 되는 날이지. 이 세상엔 단 하나의 악의 근원이 있어. 그건 바로 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나약함이야. 그리고 이 나약함이란 다름 아닌 도덕적 감수성의 빈약을 뜻하는 거야. 또한 자유의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해....... 사실 모든 발전은 우리가 자유라고밖에 달리 부를 수 없는 것에 도달하게 되어 있어. 물론 이 자유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창조적 기반을 지칭하는 거야. 이런 자유는 숙달이라고 할 수 있지. 대가는 자유롭게 힘을 사용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의도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양심은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의 것이자 궁극적인 것이야...... 결정의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결심을 하고 선택을 하는, 순수하고 진지한 의지 말이야...... 자네는 이제 모든 자연이 덕의 정신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또 그렇게 해서 더욱 안정되어 간다는 것을 알았을 걸세.”

 

그러자 하인리히는 다시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모든 자들의 형언할 수 없이 친밀한 공동체가 되는 거지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 속에서 가장 개인적인 존재의, 혹은 그의 의지의, 그의 사랑의 감지 가능한, 성스러운 현재가 되는 거죠.”

 

하인리히는 위대한 정신의 현현인 한 여인을 사랑했고, 그 여인의 죽음을 통해 자연과 우주의 부조리와 고통을 깨달았으며, 그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각 개인이 지닌 양심과 자유의 바른 의지로 실현하는 성스러운 현재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의 그리운 푸른 꽃은 한 여인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의 그리운 푸른 꽃은 온 우주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사라지고 죽음을 넘어선 사랑으로 하나되는 성스러운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그리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에 살펴본 것처럼 젊은이의 사랑의 정열이 꿈꾸는 그리움도, 회사원의 못 다 이룬 꿈의 그리움도, 더 이상 빚에 허덕이지 않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소망의 그리움도 사실은 결핍과 고통이 없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삶에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완벽한 행복!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들 모두의 그리운 푸른 꽃입니다.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과 시인들이 수천 년 동안 갈망하고 찾아 헤매온 푸른 꽃이 오늘도 깊은 밤하늘 어딘가 닿지 못할 곳에 있음을 바라봅니다.

 

그 푸른 꽃이 이 땅의 지천에 피어있을 그 날이 오늘도 무척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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