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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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장미>

by 브린니 2020. 6. 13.

장미

 

 

 

난 안다. 여기 내 손에

너, 차가운 장미를 갖고 있음을.

태양의 나약한 광선이

나신으로 네게 도달한다. 네게서 냄새가 난다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 순간

나를 속이는 너의 차디찬 냉혹함은

어디로부터? 아름다운

비밀 왕국 그곳으로부터

넌 자신의 향기를 퍼뜨린다

행복에 겨운 네 유일한 공기들, 불들,

향수들이 하늘에 침입하기 위해서?

아, 거기엔 네가 도취되는

천국의 창조물만이 있구나!

 

하지만 이곳에는 차가운 장미,

네가 움직임 없이 비밀스레 있다.

네 형상이 꾸며놓은

창백한 작은 장미.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898-1984)

 

 

 

【산책】

장미의 계절이다. 곳곳에 장미가 피어 있다.

아파트 담벼락에도, 부잣집 정원에도, 관공서에도, 공원 한 편에도, 도로 갓길, 버스정류장에도.

 

예전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꽃, 아주 비싼 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요즘엔 여기저기 피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고 장미가 값싸고 별 볼일 없는 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심코 골목을 지나다가 장미가 활짝 핀 담벼락을 보았을 때 여기에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 있네, 하고 새삼 놀란다.

문득 내가 너무 무심하게 바쁘게만 살았나, 하고 발길을 멈춘 채 살짝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지난날 장미 몇 송이가 든 꽃다발을 받고 얼마나 설레었던가.

유행가 가사처럼 비가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가 기다려지곤 했다.

누군가 한 다발 품에 품고 달려오지나 않을까.

장미 한 송이를 등 뒤에 숨기고 수줍게 서서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장미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장미를 보는 것만으로 뭔가를 꿈꾸게 한다.

아름답다는 것 이상으로 뭔가 강렬한 에토스를 느끼게 한다.

장미에겐 뭔가 있다.

 

6월에 산책을 하면 곳곳에서 장미를 볼 수 있다. 이제 정말 흔한 꽃이 된 것일까.

그러나 여기저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미를 볼 때마다 왠지 설렌다. 그것이 장미다.

 

길에서 만나는 장미 대부분이 붉은 장미다.

불타는 사랑, 사랑의 비밀을 상징하는 빨간색 장미.

 

장미는 의외로 많은 색깔의 꽃이 핀다.

 

존경, 순결을 나타내는 흰 장미.

부케를 만들거나 존경하는 분에서 선물하기에 좋다.

 

분홍 장미는 사랑의 맹세, 행복한 사랑을 표현하기에 사랑의 고백이나 프로포즈에 알맞다.

 

노랑 장미는 완벽한 성취를 나타내는 반면에 그 성취를 시기, 질투하는 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꿈, 그것들의 불가능성을 노래하던 파란색 장미는

한때 인공색소를 입혀야만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연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파랑 장미는 오히려 희망과 기적을 알리는 꽃이 되었다.

 

보라색 장미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동시에 불완전한 사랑 이야기한다.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흔들리기 때문일까.

 

주황색 장미는 수줍음, 첫사랑 고백을 상징한다.

오렌지 빛? 상큼한 첫사랑을 떠올리기에 적당한 꽃이 아닐까.

 

초록 장미는 천상의 고귀한 사랑을 나타낸다.

초록 장미를 쉽게 볼 수 없듯이 아마도 천상에서나 지천으로 볼 수 있을까.

 

검정 장미는 요즈음 가장 핫한 장미다.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기에 남성들이 여성을 매혹할 때 많이들 선물한다.

하지만 검정 꽃은 어둠과 배신을 떠올리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반전 매력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아주 이중적이다.

그래서 더 매혹적인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항상 배신과 상처와 아픔과 헤어짐이 따라오니까 말이다.

 

장미를 말려 차로 우려내 마시면 건강과 미용에 좋고, 마음을 힐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면역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바이러스 예방에도 좋다.

비타민C가 많이 들어 있어 피로 회복에 효능이 있고,

피부를 진정시키고 재생하는 데 효력을 발휘한다.

여성들의 생리불순이나 생리통 완화에도 도움을 준다.

 

장미는 우리의 일상에 아주 친근하게 들어와 있다.

서양의 화려한 궁궐에 피어 있던 꽃으로만 인식되던 때가 그리울 수도 있겠지만

장미를 가까이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자, 이제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리며,

비센테 알레익산드레의 시 <장미>를 읽어보자.

 

이 시의 장미는 일단 차갑다는 촉각으로부터 시작한다.

차가운 장미, 차디찬 냉혹함, 창백한 작은 장미, 이것이 장미의 느낌이다.

 

그런데 이 차가운 장미가 빛을 만나면 거기서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차디찬 냉혹함으로부터 향기를 퍼뜨린다.

그리고 이제 그 향수들이 하늘에 침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모두 천상에서 벌어지는 듯하고,

 

이곳엔 차갑고, 창백한 장미만이 비밀스레 놓여 있다.

내 손 안에, 당신 손 안에.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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