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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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저녁에>

by 브린니 2020. 6. 14.

저녁에

 

 

눈이 건초를 뒤덮었다

천장 밑 틈바귀를 통하여.

나는 건초를 휘저어 놓았다

그때 나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나비여, 나비여.

그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보존해 냈다.

건초 곡간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하며 겨울을 난 것이다.

나비는 건초더미에서 나와 두리번거린다.

마치 이성을 잃은 박쥐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통나무 벽이 낯설다는 듯이.

나는 나비를 얼굴 가까이 가져와서

그의 꽃가루를 본다

불보다도 선명하고

나 자신의 손바닥보다 분명한 그 꽃가루를.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우리 단 둘만이 여기 있다.

그리고 나의 손가락은 따사롭다.

6월의 나날처럼.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5년 作

 

 

 

【산책】

이 시는 ‘겨울 물고기’에 이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봄이 되었다. 겨우내 묵었던 건초더미를 뒤집는데 갑자기 툭, 나비가 튀어 나온다.

물고기가 얼음 밑에서 겨울을 이겨냈던 것처럼 나비는 건초 밑에서 겨울을 버티었다.

건초는 썩는다. 그 썩어가는 것 속에 생명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건초를 벗어난 나비는 어리둥절 방향을 찾지 못한다.

자유를 얻은 흑인노예들이 그랬을까. 그들 중 적지 않는 수가 농장주들에게 돌아갔다고 전해지지 않은가.

그러나 나비는 불보다 선명한 꽃가루를 뿌리며 날고 있다.

자유를 향해 높이 날 것이다.

불타오를 것이다.

겨울을 모두 다 녹이고 찬란한 여름날의 창공을 유유히 비행할 것이다.

 

산책을 떠나기 전에 창턱에 기대어 읽고 싶은 시이다.

따뜻하고 밝고 눈부시다.

노을이 물드는 창문을 열고 저녁 공기를 맞이해 보라.

 

저물녘의 붉은 기운 속에서 나비의 꽃가루가 번진다.

손을 벌려 노을을 한 줌 움켜잡아보라.

거기에 나비 꽃가루를 뿌려보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빛깔로 불타오르는 빛과 불의 향연을 보게 되리라.

이제 햇살에 얼굴이 반쯤 물드는 것을 느끼며 저녁 산책을 해보자.

 

노을 속을 걸어가 저 너머로 가보자.

나비를 따라서 몽환의 길을 걷자.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나비가 내 등 뒤를 날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세상을 향해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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