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 함석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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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바가바드 기타> 함석헌 주석

by 브린니 2020. 6. 15.

힌두교 경전에는 <베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등이 있는데, <베다>나 <우파니샤드>는 전문 지식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 반면, <바가바드 기타>는 하층 천민들에 대한 해탈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간디는 이 책을 외우기 위해서 아침마다 한 절씩 써붙여 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속으로 외웠고,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서양의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신약성경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말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본래 <마하바라타>라는 인도 서사시의 제6권에 속하며, 전쟁 준비를 하던 아르주나 왕자가 그의 마부이자 스승인 크리슈나와 대화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전쟁을 앞둔 아르주나 왕자는 고뇌합니다.

 

“크리슈나님, 나는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다 원치 않습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스승들, 아버지들, 할아버지들, 아들들, 손자들까지 그리고 백숙부들, 장인들, 내외종형제들, 그 밖의 여러 친척들, 그들을 내가 죽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들 손에 죽을지언정...... 그들이 비록 흉악범이기는 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고뇌의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마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했던 햄릿의 고뇌처럼 깊습니다. 아르주나는 왕좌를 두고 다툼을 벌여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도대체 그 전쟁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괴로워합니다.

 

또한 아르주나가 자신의 마부인 크리슈나에게 이토록 존칭을 하고 배움을 얻으려 한다는 것도 심상치 않습니다. 마부가 스승이라니요? 혹은 스승을 마부로 삼다니요?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은 크리슈나가 영원 무결의 본체인 브라만의 특별한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나타난 이가 예수이듯이, 브라만이 인간이 되어 나타남이 바로 크리슈나입니다.

 

예수는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수로 살았습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종 마부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신이 인간 세상에 오신 것으로 믿는 것은 인간이 예수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임을 의미하듯이, 크리슈나를 신이 인간의 세상에 오신 것으로 믿는 것 역시 힌두교인들에게는 사람의 영혼이 궁극적인 경지에 다다라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주리고 목마름을 알고 슬픔과 괴로움을 알고 외롭고 버림당함을 알듯이 크리슈나 역시 그것을 알며, 예수가 우리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주듯이 크리슈나 역시 우리에게 이기주의를 버리고 시간을 초월한 영적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진리의 가르침을 줍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모든 사람이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주석자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관(觀)이야 어떤 것을 가졌거나 간에 열심히 찾는 자에 대해 갚아주신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제 신이 아닌 다른 신을 거부한다. 저들의 자기 신에 집착하는 마음이 눈을 어둡게 하여 신성(神性)의 보다 큰 통일성을 못 보게 한다. 이는 종교적인 생각 속에 남아 있는 이기주의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르치는 여러 가지 요가의 깨달음 중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무행위’입니다. 무행위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되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제 욕심에서 나오는 행동을 피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혼으로 제 할 의무를 다 하는 것입니다.

 

간디는 이 ‘무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위의 비밀을 파악한 깨달은 자는 어떤 행위도 제게서 나가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으로 행위 속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참 요가 닦는 자다.”

 

이런 무행위가 가능한 것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나로서가 아니고 ‘참 나(혼)’으로서 가능합니다. 크리슈나는 온 우주를 다 꿰뚫고 만물을 지지하면서도 초월하여 불변하시는 대주재의 참 나를 나타냅니다.

 

‘참 나’는 자기가 내놓은 우주적 바퀴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낱 나(각 개인)’가 되고, 자라고, 애쓰고, 고통하고, 죽으면서, 나고 또다시 나고 하지만, 참 나는 영원히 자유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인간이 지어진 모습에 대하여 설명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어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자 살아있는 생령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우주적 주재자인 ‘참 나’가 각 개인으로 ‘낱 나’가 되었기에 세상 속에서 ‘낱 나’로서 고통받을지라도 ‘참 나’인 본체로 살아가면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한 예수의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크리슈나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남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누리의 대창조주로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모든 죽을 인생 속에서 미혹에 빠지지 않고, 일체의 죄악으로부터 해탈됨을 얻을 것이니라.”

 

이런 해탈을 얻은 사람은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고, 정결하고 일에 능숙하며, 관심거리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으며...... 비난과 칭찬을 같이 보며, 잠잠하여 모든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하나님에 대해 우주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살아 계시는 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하나님, 브라만이 인간이 되어 나타난 이가 크리슈나인데, 그는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마부로 인간의 걸음 앞에 한발 앞서 길을 안내합니다.

 

서양 세계를 이끌어온 사상적 기반으로서 기독교의 신약 성경이 존재한다면,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 인도의 일반 대중들의 사상적 기반은 신약 성경과 아주 유사한 이 <바가바드 기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근원,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사상적 여정 위에 계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왜 오랜 세월, 서양과 동양에서 동시에 이런 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을 이끌어오게 된 것일까요? (<바가바드 기타>도 <신약성경>이 쓰였던 A.D. 1~2세기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정말 그것은 우주 저편에서 건너온 신의 숨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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