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칼 크롤로브 <나를 위한 풍경>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칼 크롤로브 <나를 위한 풍경>

by 브린니 2020. 6. 17.

나를 위한 풍경

 

1

그 속에

광물질과 형용사를

모을 것

 

나무 그림자들은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다

 

한낮은 그 속에서

기하학적인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먹는다

 

나의 풍경은

바람처럼 배고프게 한다

 

팔이 긴 사람은

하늘을 만질 수 있으리라

 

지친 새들은

허공에서 잠을 잔다

습관적으로

색색가지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기나긴 황혼의 전설

 

밤은 불탄다 :

쌓아 놓은 목탄

 

2

연기구름의

믿을 수 있는 아름다움

 

확신은

지평선에 메아리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버들가지의

사분의 일 박자의 멜로디 :

일어나는 소음들은

나방의 날갯짓처럼 사라진다

 

어제 유클리드가 정돈해 놓은

검은 올리브의 들판

 

나는 그 들판이

내 눈 앞에서

마른 빛 속에 어른거리게 한다

 

3

소금기어린 바닷가에

비치는 작은 배

 

젖은 장미의 냄새가 난다 :

죽음의 통고

 

푸른 들판을 가로질러 가기 :

들판의 침묵은

옮겨 놓을 수 없다

내 눈까풀 위의 풀잎 가루

 

나뭇잎이 떨어지는 낮의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조심스럽게

그 위로 몸을 굽힌다

 

스스로 죽어가는 장미꽃들은

지나간 날의 詩들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 칼 크롤로브 (독일, 1915-1999)

 

 

 

【산책】

“들판의 침묵은 옮겨 놓을 수 없다”

이 한 구절을 가지고 들판으로 나가보자. 들판이 훤히 보이는 장소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도시에서는 작은 숲을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너른 들판. 그러나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들판. 바람이 지나가면 얕은 흙먼지를 일으키는 들판. 새들의 날갯짓마저도 조용한 들판.

 

고진하 시인의 <빈 들>이란 시가 떠오르지 않는가.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 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 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 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 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 들 빈 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아마도 가을걷이가 끝난 뒤의 들판의 풍경이 이러하리라.

밀레의 ‘만종’의 시간.

 

고요한 저물녘의 들판. 그 들판의 침묵은 옮겨올 수 없다.

침묵을 다른 말로 시에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위한 풍경은 지평선을 갖고 있는 유클리드가 정돈한 듯 검은 올리브 들판이다. 들판은 내 눈 앞에서 마른 빛 속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그 들판은 말이 없다.

 

들판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밑에 누워보자. 장미의 향내를 맡으며 죽음과도 같은 잠에 취해보자.

지난날의 그림들이 흘러 지나가고 추억은 사라지고 향기만 남아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