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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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 산책] 칼 크롤로브 <연가> 연가 1.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녹색의 굵은 호두를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밤에 껍질을 벗긴 듯 말간 풍경 속에 물고기와 나뭇잎의 향기나는 풍경 속에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푸른 우유 속의 두 개의 머루 같은 너의 눈이 성냥불빛 속에 비친다 느릅나무 그림자 속의 둥근 달은 부드럽게 비추이지 않는다 달은 낡고, 닳았고, 바람에 부숴져 모래시계처럼 우울하게 흘러내린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침묵의 철자들을 나열해 본다 바람 없는 추위 속에 매운 상치냄새를, 너의 입을,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 조각처럼 녹아드는 새벽 여명 속에 사실적으로 되어가는 밤을 철자로 읽어 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2. 너는 가버리고…… .. 2020. 6. 15.
[창작 시] 달콤한 인생 달콤한 인생 그는 당뇨병에 걸렸다 커피를 마실 수 없고 야식으로 치킨과 피자를 먹을 수 없다 3년 전 실직과 최근 얻은 직장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새벽마다 잠에서 깬다 실내 온도 24°C 생의 절망으로 몸을 부르르 떤다 이대로 죽는다면 아내와 아들은 과부와 고아가 된다 오직 신만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 일어나 스탠드를 켜니 아내의 수첩이 보인다 목살 2근, 파절임과 소스, …… 내일 장 볼 목록이 적혀 있다 언제까지 내일이 반복될까 목살에 소금 후추 간 간한 후에 칼집 내어 힘줄 끊기 밀가루 충분이 입히기 기름 넉넉히 두르고 고기 올리고 통마늘 올린다(약불) 통마늘 익으면 꺼내고 팬에 기름을 제거하고 버터 1큰술 넣고 센 불에 굽는다 지겹고 똑같은 일상이어서 부디 내일도 계속 되기를! 그는 기도를.. 2020. 6. 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제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살라는 직접 명령이기도 합니.. 2020. 6. 14.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저녁에> 저녁에 눈이 건초를 뒤덮었다 천장 밑 틈바귀를 통하여. 나는 건초를 휘저어 놓았다 그때 나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나비여, 나비여. 그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보존해 냈다. 건초 곡간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하며 겨울을 난 것이다. 나비는 건초더미에서 나와 두리번거린다. 마치 이성을 잃은 박쥐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통나무 벽이 낯설다는 듯이. 나는 나비를 얼굴 가까이 가져와서 그의 꽃가루를 본다 불보다도 선명하고 나 자신의 손바닥보다 분명한 그 꽃가루를.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우리 단 둘만이 여기 있다. 그리고 나의 손가락은 따사롭다. 6월의 나날처럼.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5년 作 【산책】 이 시는 ‘겨울 물고기’에 이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봄이 되었다. 겨우내 묵었던 .. 2020. 6. 14.
뜻밖의 변화들― 혼인금지법 2 뜻밖의 변화들 ― 혼인금지법 2 혼인금지법이 발효되자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출산율이 높아졌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정부에서 양육해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기쁨 플러스, 그 아이를 양육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프리미엄까지 얻었으니 굳이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출산율이 곤두박질쳤었는데 혼인금지법 시행 불과 1년 만에 플러스로 돌아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영아들도 크게 줄었다. 미혼모들이 아기를 낳아 혼자 기를 수 없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정부 출산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다만 구청에 출생 신고를 하려면 반드시 부모가 같이 가야만 .. 2020. 6. 14.
[창작 시] 수련 수련 물에 몸을 띄우고 물의 일렁임을 피부에 덮는다 물에 귀를 대고 물의 알갱이들이 토닥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물에 몸을 뉘이고 저녁 노을이 물에 흘러넘치는 걸 느낀다 몸에도 빛이 스며들어 불을 지핀다 초록잎은 연약한데 잘게 흩어져 가느다란 꽃대를 감싸고 이마에 핀 주홍빛 꽃은 여인을 품고 있다 손가락만 한 세월 깊은 여자 물에 몸을 반쯤 잠그고 바람이 들고 나는 것을 훔친다 바람은 물과 몸을 반쯤 섞어 놓았다 물은 짙푸르게 멍들고 몸은 점점 투명해진다 물 위의 꽃 물 아래 꽃 물과 몸의 경계에서 꽃은 피고 잠들고 눈을 뜬다 2020. 6. 13.
길병민, 살아남은 자의 슬픔 (feat. 일냈다-Senza Luce)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난 김에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매일매일 살아남고 있습니다. 더 치열한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도 물론 있습니다. 전쟁 통에 살아남은 사람도 있고, 정치적 격변기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고, 큰 사고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시대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애를 씁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고통에서 질병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씁니다. 그 속에서 때로는 이겨서 승자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진 사람도 치열하게 홀로 남아 눈물을 삼키며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모두의 살아남음이 외따로 있기에 슬프지만, 그런 인류로 뒤덮인 이 땅의 밤하늘에는 같은 별이 빛나고, 깊은 밤에 내쉬는 한숨은 어디로.. 2020. 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소금은 고대 종교의식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언약과 연관된 의미를 지녔습니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도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들어 제자들에게 소금처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 2020. 6. 13.
[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장미> 장미 난 안다. 여기 내 손에 너, 차가운 장미를 갖고 있음을. 태양의 나약한 광선이 나신으로 네게 도달한다. 네게서 냄새가 난다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 순간 나를 속이는 너의 차디찬 냉혹함은 어디로부터? 아름다운 비밀 왕국 그곳으로부터 넌 자신의 향기를 퍼뜨린다 행복에 겨운 네 유일한 공기들, 불들, 향수들이 하늘에 침입하기 위해서? 아, 거기엔 네가 도취되는 천국의 창조물만이 있구나! 하지만 이곳에는 차가운 장미, 네가 움직임 없이 비밀스레 있다. 네 형상이 꾸며놓은 창백한 작은 장미.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898-1984) 【산책】 장미의 계절이다. 곳곳에 장미가 피어 있다. 아파트 담벼락에도, 부잣집 정원에도, 관공서에도, 공원 한 편에도, 도로 갓길, 버스정류장에도. 예전에는 .. 2020. 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