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변화들― 혼인금지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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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뜻밖의 변화들― 혼인금지법 2

by 브린니 2020. 6. 14.

뜻밖의 변화들 ― 혼인금지법 2

 

 

혼인금지법이 발효되자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출산율이 높아졌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정부에서 양육해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기쁨 플러스, 그 아이를 양육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프리미엄까지 얻었으니 굳이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출산율이 곤두박질쳤었는데 혼인금지법 시행 불과 1년 만에 플러스로 돌아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영아들도 크게 줄었다. 미혼모들이 아기를 낳아 혼자 기를 수 없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정부 출산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다만 구청에 출생 신고를 하려면 반드시 부모가 같이 가야만 한다. 그래야 유전자 검사를 하고, 그 기록이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는 것이다. 결혼 유무는 상관없지만 아기의 친부모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했다. 친부모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면 정부에서도 아이의 양육을 맡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유무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혼전 임신을 한 커플들도 당당히 구청 문으로 들어가 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출생 신고 이전에 임신 때부터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신한 커플은 구청에 가서 임신 사실을 알리고, 그에 따른 차후 절차를 도움 받게 된다. 병원을 소개받고, 진료비를 지원받는다. 그리고 아기를 출산하면 유전자 검사를 받은 뒤 기록으로 남긴다. 결혼 유무와 관계없이 임신과 출산을 정부로부터 보장받는 것이다.

 

4포 세대 젊은이들에게도 희망이 생기게 되었다. 오히려 마음 놓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된 것이다. 혼인금지법이 발효되면서 결혼은 더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A와 B도 ‘두 사람의 집’에서 만날 때면 혼인금지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카페 주인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혼인을 금지하니까 결혼을 더 하려고 드는구먼.

A가 말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 아닌가.

카페 주인이 맞장구를 쳤다.

혼인금지법이 아이 양육에 새 길을 연 셈이 됐지.

B도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법이 바뀌니까 세상이 바뀌는구먼.

카페 주인이 말했다.

원래 법이란 그러려고 만드는 것 아니겠어.

A가 말했다.

미혼모 출산도 줄었고, 영아 유기도 사라지고, 아기 수출도 뜸하다더군.

주인이 덧붙였다.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다는 게 정말 좋은 변화라고 봐. 무라카미 류의 <코인라커 베이비>가 생각나. 10대 소녀가 역에 있는 무인물품보관함에 영아를 유기한다는 얘기였지.

B가 말했다.

 

아,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 2011년인가, 방배역에서 아기 시신이 담긴 가방이 발견됐었어.

어느 교회는 예배당 앞에 베이비 박스를 놓고 미혼모들이 버리는 아기를 맡아 기르거나 아동복지센터에 인계하는 일을 했었지.

화장실에 영아가 버려졌다는 뉴스도 꽤 나왔어.

그런 일들을 전해 들으면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것 같아. 버려지는 것도, 버리는 것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

 

세 남자는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생이란 커다란 축복 앞에 비극적인 슬픔이 동반된다면 버리는 자와 버려지는 자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

 

정부가 육아를 담당한다는 정책이 국민들의 기본적인 존엄을 보장한다는 헌법 정신을 구현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아이들 양육을 맡아주니까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더 활발해졌다더군.

예전엔 아이들 맡기는 게 정말 고역이었지. 사회 생활하려면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꼭 필요했으니까.

공동 시설에 아이를 보내는 않는 맞벌이 부부는 베이비시터를 집안에 들이는 건가.

그런데 베이비시터도 정부에서 보조하나?

아니, 베이비시터는 각자 부담이야. 우선 아이를 낳으면 공동시설이나 집에서 양육하는데 집에서 양육하는 경우 부모가 직접 육아를 담당하거나 조부모가 맡아. 그런데 베이비시터를 들이고자 한다면 각자 알아서 하라는 거야. 정부의 시책은 공동시설 육아나 집에서 양육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지. 그 두 가지 방법 중 하나가 아니라면 각자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각 가정에 고용하는 베이비시터 비용까지 보조하긴 어렵겠지.

A가 설명했다.

 

정부는 놀이방, 어린이집, 유치원 등을 활용하면서 양육비를 보조하고 있어.

새로 생긴 시설도 꽤 많던데.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거야. 정부가 직접 짓는 것은 별로 많이 않고 민간에서 주도할 거야. 더 좋은 건 여성들의 일터가 늘어난다는 것이야. 1인1직업법이 실현되려면 이런 종류의 일자리가 더 생겨날 거라고 봐.

그렇지. 아이들이 매일 먹는 식사와 간식거리를 공급하는 업체나 놀이기구, 예술교육자재 계발 업체 등도 많이 필요하게 될 거야.

출산율이 높아지니까 노동인구, 소비나 생산인구 등도 같이 상승한다는 게 매우 바람직한 것 같아.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이번 정부는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

주인이 물었다.

오래전에 대통령 한 분이 탄핵되면서 우리 사회가 격동에 휘말렸지. 탄핵될 때 법적인 것과 별개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세월호 사건이었어. 십대 청춘들이 죽어가는 시간에 대통령이 공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사생활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게 쟁점이었지.

B가 말했다.

 

맞아. 사르트르가 말했잖아. 인간은 모든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국민들이 재난에 처했는데 다른 일에 정신을 팔수가 있어.

그때부터 우리 사회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봐.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

 

코로나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맞아.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다고 봐.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거지. 결코 개인이 개인 한 사람으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동체 전체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된 거야.

그럴수록 사람이 사람을 존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맞아.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졌고, 직장을 잃었고, 삶의 기반이 무너졌지. 하지만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코로나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곤경에 빠뜨렸어. 전세계 사람들마저.

한 동안은 국경을 폐쇄하고 난리들이었지.

맞아. 그렇지만 곧 폐쇄 정책을 쓰는 것은 공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야. 다시 국경을 열고 서로 교통했어.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영화에서 좀비가 나타난 곳을 폐쇄한 뒤 소통 작전을 피거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지 몰라도 곧 폐쇄한 곳에 균열이 생기도 다른 곳까지 번지지. 바이러스도 그래. 막는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야. 바이러스 역시 인간들과 같이 살아. 같이 살면서 지혜롭게 이겨내는 방법을 생각해야지.

아무튼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야.

맞아. 모든 문제는 사람이 사람을 파괴하면서부터 시작되니까. 경멸과 무시에서부터 억압과 폭력이 싹 트니까.

 

아무튼 그런 시절을 십 년 이상 거치고 나니까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지. 첫째로 아이가 태어나면 뉘 집 자식이냐를 따지지 않고, 우리 모두의 자녀로 기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금수저, 흙수저 나누지 말고, 모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양육하겠다는 것이지.

처음에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지?

 

한 사람이 아닐 거야. 어느 때부턴가 사회의 여론이 그쪽으로 흘러갔어. 정부는 국민을 다스리는 기관이 아니라 국민의 생각과 정신이 모이는 곳, 일종의 플랫폼, 링크와 같다고 느낀 것이지. 어쩌면 정부는 국민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된 거지. 정책도 국민 모두가 공동으로 만들어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

 

정말 4차 혁명인가. 십여 년 만에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 4차 혁명이 단지 기술적인 면에서만 혁명이 아니라면 정말 좋은 거지.

이제 5차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지. 산업혁명이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산업의 변화만은 아니었잖아. 사회 구조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지.

 

B는 커피를 천천히 깊이, 마치 긴 숨을 빨아들이듯 마셨다. 뜨겁고 진한 커피가 목줄기를 지나 가슴을 데우고 내장을 타고 내려갔다.

 

어느 사회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의 변혁을 원한다면 사회구성원의 의식(인식)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제도를 바꿔라.

 

B는 혼인금지법이 상속금지법이 될 것이라고는 믿고 있었지만 상속 이전의 문제부터 건드리게 될 줄을 알지 못했다. 제도를 바꿈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데 약간 흥분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부모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가 인생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부터 국가가 나서서 어느 부모에게서 태어났든 모두 다 국가의 아이들로 키우겠다고 나섦으로써 부모 때문에 달리지는 운명을 보편적인 삶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도 차이는 발생하겠지만 일단 기본적인 토대는 마련한 셈이다.

 

모든 생명은 존엄을 갖고 살 권리가 있다. 법은 이런 권리를 보장하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혼인금지법, 이 새로운 법이 생명과 존엄의 토대를 닦는 뜻밖의 일들을 시작하고 있다.

 

A역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뜻밖의 변화들을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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