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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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 시] 산책

by 브린니 2020. 6. 12.

산책

 

 

 

아파트 단지와 개천 사이로 난 길이 있다

초입에 작달막한 기둥 두 개

차들을 막고 서 있다

길은 4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고

거기서만 차들이 쌩쌩 달릴 수 있다

 

금지된 것은 생명을 보살핀다

개천에는 아주 가끔 오리들이 헤엄치지만

대개는 말라 있다

 

전신주 아래 누군가 전염병을 막는

일회용 마스크를 벗어 놓았다

방범용 CCTV 카메라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손톱달은 부끄러워하고 만월은 불길하다

 

이 길은 몇 번이나 아내와 걸었다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혼자 걷고 있다

저녁 먹은 것이 가슴부터 목까지 차오르고 비튼다

이러다 죽겠다

죄를 고백하고 양심을 토해놓고 싶다

 

봄인데 날씨는 쓸쓸하다

숨차게 뛰어보려다 그만둔다

패딩 점퍼에 손을 깊이 찌르고 후드를 덮어 쓴다

몇 분 뒤 몸이 가렵고 돌기가 돋는다

당뇨 때문인가 자다가 피나도록 긁기 일쑤다

참회와 고행, 피에타, 프라겔롬

반달모양 다리를 건너 아파트 쪽으로 간다

 

25평, 세 식구에 적당한 크기다

아들은 대학 기숙사에서 몇 주에 한 번씩 오고

아내는 아이들 몇에게 그림과 공예를 가르친다

적은 벌이로 생활을 예쁘게 가꿀 수 있다

 

아래로 줄기를 늘어뜨리는 식물과 꽃을 피우는 선인장,

고흐나 모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퍼즐을 살 수 있다

아내는 천 개의 조각들을 하나로 잇는다

 

“집중하면 잊는 데 그만이야”

그림은 차례대로 벽에 걸리고

아내의 집은 텅 빈다

머리가 투명해지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내 인생은 아내 때문에 근근이 버틴다

슬픔은 턱턱 가슴을 치받는다

사랑은 늘 목이 메인다

시계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아내가 걱정할 것이다

발을 날래게 옮겨도 제자리 같지만

산책은 어느 정도 결과물이 있었다

외국에서 온 상품들을 파는 대형물류센터로 가서

똥을 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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