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연애
1
몇 번의 연애와 배신과 상처에 지쳐갈 쯤 그대를 만났네
그해 겨울은 눈이 퍼부었네
비틀, 비틀대며 위태롭게 경복궁 돈화문 창경궁 광화문 뒷길을 걸었네
눈 속에 파묻힐까 그대 품에 파고들었네
키가 크고 코트 자락이 바닥에 쓸리던
남자 뒤에 숨어 옛 기억을 잠시 잊었네
내리는 눈이 먼 곳으로 데려갔네
여러 사람 앞에서 축하받는 날
그대는 빈손으로 찾아왔네
기뻤네 사람들 사이에 그대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와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와 밤길을 걸었네
마지막 전철을 타려고 시청역 코인락커 앞에 멈췄네
그대가 건네는 열쇠로 함을 열었을 때
거기,
수줍은 들국화 한 묶음 놓여 있었네
쑥스러워하는 소년이 내 곁에 서 있었네
2
무작정 걷기만 했네
돈화문 뒷길 눈이 없던 가을날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네 오래도록
나무들이 앙상했고 낙엽은 붉고 노랗게 쌓였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쏟아냈는지, 말하고 또 말하고, 듣고 들었네
어쩌면 심각하게, 때론 부서져라 웃으며
가난한 연인들 길 위에 있었네
가고 싶은 길이 많았지만 늘 그곳을 맴도네
누가 먼저 말했는지
연애는 이제 그만. 감정이 넘쳐 지치게 해. 결혼할 수 없으면 헤어지자.
남자는 서른이 훨씬 넘었고
처녀는 더 늙고 싶지 않았네
당신은 순하고 미래가 밝아.
처녀는 믿음과 통찰력을 갖고 말했네
착한 남자가 타락하면 속수무책이란 걸 그땐 알 수 없었네
처녀는 투명하고 따뜻한 속을 열어 보이고,
남자는 깊고 서늘한 심연을 지녔네
연애가 끝나고 있었네
연인들 더 먼 곳을 향해 몸을 돌렸네
3
신부는 이집트 여왕 같았네
알뜰하고 소박했던 스물일곱 해
오늘, 딴사람처럼 꾸몄네
처녀는 기뻤네
사랑하는 남자 하나만 있으면 고요하고 욕심 없이 살 거야
신부는 불안할 만큼 큰 눈을 지녔지만
세상을 향해 자신만만해 보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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