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짧은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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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 시] 짧은 연애

by 브린니 2020. 6. 8.

짧은 연애

 

 

1

몇 번의 연애와 배신과 상처에 지쳐갈 쯤 그대를 만났네

그해 겨울은 눈이 퍼부었네

비틀, 비틀대며 위태롭게 경복궁 돈화문 창경궁 광화문 뒷길을 걸었네

눈 속에 파묻힐까 그대 품에 파고들었네

키가 크고 코트 자락이 바닥에 쓸리던

남자 뒤에 숨어 옛 기억을 잠시 잊었네

내리는 눈이 먼 곳으로 데려갔네

 

여러 사람 앞에서 축하받는 날

그대는 빈손으로 찾아왔네

기뻤네 사람들 사이에 그대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와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와 밤길을 걸었네

 

마지막 전철을 타려고 시청역 코인락커 앞에 멈췄네

그대가 건네는 열쇠로 함을 열었을 때

거기,

수줍은 들국화 한 묶음 놓여 있었네

쑥스러워하는 소년이 내 곁에 서 있었네

 

 

2

무작정 걷기만 했네

돈화문 뒷길 눈이 없던 가을날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네 오래도록

나무들이 앙상했고 낙엽은 붉고 노랗게 쌓였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쏟아냈는지, 말하고 또 말하고, 듣고 들었네

어쩌면 심각하게, 때론 부서져라 웃으며

가난한 연인들 길 위에 있었네

 

가고 싶은 길이 많았지만 늘 그곳을 맴도네

누가 먼저 말했는지

연애는 이제 그만. 감정이 넘쳐 지치게 해. 결혼할 수 없으면 헤어지자.

 

남자는 서른이 훨씬 넘었고

처녀는 더 늙고 싶지 않았네

당신은 순하고 미래가 밝아.

처녀는 믿음과 통찰력을 갖고 말했네

착한 남자가 타락하면 속수무책이란 걸 그땐 알 수 없었네

 

처녀는 투명하고 따뜻한 속을 열어 보이고,

남자는 깊고 서늘한 심연을 지녔네

연애가 끝나고 있었네

연인들 더 먼 곳을 향해 몸을 돌렸네

 

 

3

신부는 이집트 여왕 같았네

알뜰하고 소박했던 스물일곱 해

오늘, 딴사람처럼 꾸몄네

처녀는 기뻤네

사랑하는 남자 하나만 있으면 고요하고 욕심 없이 살 거야

신부는 불안할 만큼 큰 눈을 지녔지만

세상을 향해 자신만만해 보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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