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일하는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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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마트에서 일하는 손님

by 브린니 2020. 6. 8.

마트에서 일하는 손님

 

 

 

어느 날 마트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그는 카트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며 상품을 샀다. 이것저것 마구 카트에 담는 게 아니라 상품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히 살핀 뒤 가격도 비교하면서 쇼핑을 했다. 몇 시간 동안 매장을 돌아다닌 후 그가 사들인 상품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는 계산하기 전 매장 직원에게 매니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직원이 물었다.

아뇨, 여쭤볼 게 있어서요.

그가 대답했다.

직원은 매니저에게 무전을 했고, 매니저가 곧 달려왔다.

그는 매니저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계산을 한 뒤 매장을 나갔다.

 

며칠 뒤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 물건을 몇 개 샀고, 매장 직원에게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직원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또 물었다. 그는 매니저와 약속했다고 말했다. 직원이 매니저를 불렀고, 매니저가 와서 그를 창고 쪽으로 데려갔다.

 

그 다음날부터 손님은 매장으로 와서 일을 했다. 주로 창고에서 물건을 정리했고,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매장에 상품을 진열하는 일을 맡았다. 직원들은 그가 일하는 것을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 동안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곧 교대 근무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다만 그가 상품을 진열한 날에는 평소와 다르게 진열되어 있어서 상품이 어디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8개월쯤 일하다 매장을 떠났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에게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를 두고 수군거리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났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그만둔 지 반년쯤 지난 뒤 그가 경쟁사 마트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이 들리고 나서부터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지만 그가 남들과 달랐다는 사실을 무슨 큰 단점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강도를 높였고, 누가 누가 잘하나 성토대회가 벌어졌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그는 처음 오는 날부터 표정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 악령이 머물다간 느낌이었다. 텅 빈 얼굴, 속과 겉이 뒤바뀌어 내면이 얼굴로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마른 몸에 물기 하나 없는 허깨비처럼 보였다.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다시 한 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혼이 몸 밖으로 흘러나와 육체를 베일처럼 감싸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유령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좀비나 괴물로 보기에도 영 마뜩찮았다. 단지 그저 살아 있다는 것 말고는 그를 규정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이야 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먼 도시에서 왔으며 이곳 사람들과 말씨와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누가 말을 걸어와도 그저 얼버무리다가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낯선 이방인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가 호기심을 충족하지 못할 때 사람들과 적이 되기 쉽다.

 

그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했다. 가장 일찍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갔다. 아무도 그렇게 일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죽으라고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일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대답했다. 사연이 많은 사람이구나, 모두들 그를 그렇게 여겼다.

 

그는 셈을 잘 했다. 그의 능력인지 그가 오로지 셈에 몰두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셈에 능하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셈할 일만 생기면 그를 불러댔다. 그는 별말 없이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었다.

 

갑자기 그가 곧 매니저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매니저가 바뀔 거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지배인은 손버릇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많았다. 하지만 벌써 6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자가 상급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더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셈 거리를 더 많이 맡기는 대신에 그가 자기 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그는 아무리 많은 셈이라도 쉽게 해냈지만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해대는 것은 견디지 못했다. 그는 어쩌다 한 번씩은 웃었지만 거의 웃지 못했다. 멍한 표정도 점점 일그러졌다.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변해갔다. 너무나 미세하게 변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점심때마다 마트 건너편에 있는 아주 오래된 성당에 들어가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100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예배당에 앉아 있는 모습이 꽤 잘 어울리는 듯 했다. 수도승 같은 풍모를 풍기기도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떤 즐거움도 탐하지 않은 채 거의 시체처럼 고행을 하고 있는 구도자. 그러나 그는 선하지도, 고통에 차 있지도,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과 번뇌와 신경쇠약의 증후를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하지만 결코 내버릴 수 없는 아집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뱀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독을 품고 이글거리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선해질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인생의 시계가 멈춘 듯한 시체의 눈이었다. 그에겐 인생에 대해 애착을 보이는 태도가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식물을 목으로 넘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간식을 먹거나 군것질 거리를 탐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화장실 앞에 설치된 정수기에서 물을 마셨다. 그가 주급으로 받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으며 신입 턱도 내지 않았다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그는 여기 온 지 일주일쯤 뒤부터 물품 창고에서 잠을 잤고, 삼시 세끼를 유통 기한이 넘어 폐기되는 음식물로 해결했다.

 

여기가 노숙자 수용소야, 뭐야.

나이든 치들이 뒤에서 구시렁댔다.

물품 창고를 지킬 사람을 여러 차례 구했으나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매니저의 말이었다. 급료가 매우 낮아 지원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고 그 뒤부터 창고를 정리하고 물품을 센 뒤 잠을 자야 했으므로 하루에 5시간 정도밖에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매니저는 싼값에 창고 관리를 맡아준 그를 싸고돌았다.

 

그는 8개월쯤 버티다 마트를 떠났다. 사람들이 뒤에서 욕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뒤에서 욕하다 못해 대놓고 과거를 고백하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들 앞에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아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런데도 한 공간에 살기 위해서는 서로 가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듯이 몰아세웠다.

 

사람들은 미스터리한 그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하고도 점심을 같이 먹지 않는다는 것이 그토록 증오할 만한 일인지 그들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것이 싫었다. 그의 태도 하나하나가 그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으며 그가 속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매사에 못 마땅한 것이다.

 

잘 모른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참을 수 없고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8개월 동안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그가 손대는 사안마다 잘못된 관행과 불합리한 점들이 자주 불거졌다. 그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했고,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는 것을 사사건건 반대했다. 그들의 속마음에는 그의 주장대로 따른다면 그가 상급자가 되는 시기가 앞당겨질 거라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면 어느새 일은 조금씩 꼬였다.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는 이곳 사람들 사이에 같이 일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 찍혔다.

 

그럼에도 그가 일한 8개월간 매출은 급상승했다. 그가 관리하는 창고의 물목 중 단 하나도 분실되거나 상한 것이 없었다. 그는 매일 한두 품목씩 아주 도드라지게 진열했다. ‘오늘의 품목’이랄 수 있는데 몇 번씩 다시 진열해야 할 정도로 잘 팔렸다. 상대적으로 다른 물품들은 눈에 띄지 않아서 고객들이 직원을 부르는 일이 잦았고, 직원들은 두 배, 세 배 바빠졌다. 직원들은 매일 다른 일거리가 생겨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늘었다. 그가 떠난 뒤 매장은 옛 질서를 회복했고 사람들은 안심했다.

 

매니저는 매출 증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도드라지게 진열하는 품목이 늘수록 매출이 느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지만 매니저는 누구에게도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매출이 느는 것에 대한 보너스는 전부 매니저 차지였으니까 말이다.

 

매니저는 6개월간 평소보다 두 배나 더 보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밥 한 끼 산 적이 없었다. 그에게 이런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매니저는 그가 새로 들어온 지 며칠 지나서 왜 진열대를 뒤바꿔 놓느냐고 한 마디 했다. 그는 그저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랬다고 대구했다. 매니저는 일주일 동안 그가 진열을 바꾸는 바람에 매출이 오른 낌새를 채고 그 뒤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간간히 그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가 왜 이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당에 다닌다는 직원 한 사람이 최근에 그를 본 적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그자가 말이지. 성당으로 들어와 가운데쯤 앉더라고. 그냥 조용히 앞만 보고 있는 것 같더니, 자세히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어. 나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아, 얼마나 섬뜩하든지. 글쎄 생각해봐. 시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눈알이 빠진 검은 구멍에서 물이 흘러 나왔다고. 나랑 눈이 마주치긴 했는데 날 보는 것 같지는 않고, 뭐랄까, 그래 그러니까 나를 통과해서 내 몸 너머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어. 무섭기도 하고, 좀 신비한, 아주 묘한 느낌, 오싹한 느낌이 드는, 암튼 그랬어.

 

그런데 신부가 가만히 보더니 그에게 다가가서 한두 마디 하는 거야. 그는 순한 양처럼 일어났어. 두 사람은 고해실로 들어갔지. 나는 성당에서 나가는 척 하다가 몰래 뒤따라가서 고해실 문에 귀를 갔다 댔어. 아, 근데 고해실 밖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거야. 미치겠더라고. 그런데 한참 귀를 대고 있으니까 한 마디 들렸어.

속죄.

그자는 속죄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고, 신부도 속죄를 선포하는 것 같았어. 그자는 속죄를 위해 덤으로 살고 있다, 그렇게 말한 것 같애.

 

직원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속죄하려고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그토록 열심히 육체노동을 한 거야?

무슨 속죄를 이런 데서 하냐?

그러게. 복지 시설 같은 데서 해야 되는 것 아니야.

무슨 소리야, 감옥엘 가야지.

근데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기에 속죄를 하고 다닐 정도지?

감옥에 한 번 다녀온 게 아닐까?

그럼 전과자란 말이야?

감옥까지 갔다 왔으면 죗값을 치른 것인데 굳이 속죄하고 다닐 것까지야 없지 않나.

 

저마다 한 마디씩들 했다. 사실 그들은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 어떻게 속죄를 하든 관심이 없다. 그저 말을 할 뿐이었다. 그런 말들이 서로 서로를 끈끈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여기 없는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세상은 늘 사람을 판단한다. 세상은 그 자체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한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만 그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것이 없다. 세상이 판단하는 것이 늘 옳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아는 척을 한 직원이 말했다.

그는 속죄에 실패할 거야. 틀림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

다른 직원이 물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에서 쉽게 풀려나오지 못해. 어릴 때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성에 중독되거나 성을 거부하지. 그것들 모두 다 사실은 성에 얽매이는 것이야. 죄도 마찬가지라고. 개는 자기가 토해 놓은 것을 다시 주워 먹어. 돼지는 아무리 깨끗이 씻어줘도 다시 더러운 우리로 기어들어가. 죄인들도 마찬가지지. 그들은 다시 죄를 짓게 된다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그게 죄인들의 삶이야. 인간은 스스로 속죄할 수 없어. 그건 신의 몫이니까. 구원이나 용서, 속죄 따위는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잊을 만하면 그에 대한 이야기가 소소하게 들려왔다. 그가 이런 저런 선행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봤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풍문이었다.

 

어느 날 매니저는 경쟁사 마트를 벤치마킹하러 갔다가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뜻밖에도 그의 지위는 지점장이었다. 어떻게 그가 그런 직위에까지 올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사람을 한동안 부리며 살았다는 데 묘한 쾌감이 일었다.

 

그는 지점장실로 매니저를 데리고 들어가 커피를 대접했다.

속죄를 하겠다더니 좋은 자리에서 폼을 잡고 앉아 있네. 속죄가 잘 돼서 복을 받은 건가? 

매니저가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그는 그저 수줍게 웃었다.

자네가 떠난 뒤 자네가 했던 식으로 매장을 꾸몄지만 그만큼 매출을 오르지 않았어. 어떻게 오늘은 이 상품이 매출이 오르고, 내일은 이 상품이 눈길을 끌 거란 걸 예측했나.

매니저가 물었다.

 

일단은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대충은 알 수 있죠. 일일 데이터를 꼼꼼히 보면 며칠에 한 번씩 주기가 나타나니까요. 달걀은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구매하는 데 지난 주 수요일에 구매했으면 이번 주 화수목 중 한 번은 사야 할 겁니다. 그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날을 기준으로 달걀을 눈에 띄게 전시합니다. 라면도 그런 데이터에 적용되고요. 최근 트랜드도 분석해서 디카페인 커피가 언론에 많이 노출되면 그걸 커피 진열대 앞자리로 이동하죠.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자네는 그런 데이터 말고 다른 뭔가를 기준으로 상품을 진열하는 것 같던데.

A 매장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디스플레이를 해서 높은 매출을 올렸다고 B 매장이 벤치마킹을 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매장 간의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그곳을 방문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A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에는 A 매장 사람들의 인격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B 매장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일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러한 문제는 같은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인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장 관계자들의 인격과 소비자들의 인격이 매장 내에서 만나는 겁니다. 소비는 반드시 필요과 충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인격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아주 모호한 말이구먼. 소비와 매출 신장 같은 것에도 인격이 들어 있다? 거 참, 자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인 것 같구먼. 아주 미스터리해.

매니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아까 물었던 건 대답을 하지 않았군. 속죄는 정말 끝났나.

매니저는 그를 좀 더 코너로 몰아붙였다.

그가 다시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마도 평생을 해도 모자라지 않을까요.

그렇게나 죄를 많이 지었나.

존재 자체가 죄니까요.

살아 있는 게 죄라고? 그럼 빨리 죽지 그러나.

매니저가 그가 늘어놓는 궤변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내뱉었다.

 

내가 스스로 태어났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게 아닌데 마음대로 죽을 수는 없죠.

그럼 죄 짓는 것은 스스로 한 것인가? 속죄하는 것도?

태어나고 죽는 것 말고는 모두 스스로 하는 것이죠.

근데 자네 우리 매장에 오기 전에 뭘 했나?

돈 만지는 일을 했었죠. 근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된 것인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등을 소파에 기댔다.

 

그래, 그건 뭐 그렇다고 치고. 근데 어떻게 해서 마트 지점장까지 올랐나.

매니저님 매장에서처럼 일했을 뿐입니다. 여기 매니저가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저를 후임으로 추천해주었고, 지점장이 본사로 발령받으면서 저를 지점장으로 추천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우리 매장은 연공서열을 따지는데 여기는 실력대로 진급을 결정한다 이 말이로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미소를 띠며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아, 하.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인격으로 지점장에 올랐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로군.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는 매장을 빠져나오면서 그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아니, 그를 만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누군가 자신이 그와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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