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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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혼인금지법

by 브린니 2020. 6. 5.

A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쪽으로 가고 있어. 내가 오늘 기막힌 뉴스를 들었거든. 커피 마시면서 얘기해줄게.

 

A는 운전을 하면서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A는 늘 과장된 몸짓과 높은 톤으로 대화를 이끌곤 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기에 미리 전화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A는 커피숍 주문대 앞까지 와서야 어서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기 일쑤였다. 아니면 미리 카페에 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B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하루치 분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면 커피 마시러 나오라고 넌지시 권했다. A는 늘 유쾌했다.

 

그들이 만날 때면 언제나 커피숍 3층 발코니 맨 끝 자리였다. ‘두 남자의 집’은 4층짜리 건물로 3층까지 카페로 사용하고 꼭대기 층엔 주인이 살았다. 요즘 대부분의 카페가 전체 금연구역인데 이 자리에서만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건물 주인도 흡연자여서 카페 영업이 끝난 뒤 여기서 혼자 담배를 피우곤 한다고 했다.

 

‘두 남자의 집’은 동업자와 함께 시작했는데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서 맡아서 하고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동업자 가족에게 투자금을 갚고, 생활비도 보내주느라 경영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 바람에 다른 카페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메뉴들을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7년 만에 함께 시작했던 친구의 지분은 모두 정리되었고, 임대로 살던 건물도 사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남자가 떠난 뒤에도 카페 이름은 ‘두 남자의 집’을 고수하고 있었다.

 

B, 내가 오늘 무슨 얘기를 들은 줄 아나?

A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면서 소리를 높였다.

커피나 주문하고서 말하지 그러나.

B가 A를 달랬다.

 

조금 있다가. 글쎄 우리 병원 환자 중에 국회에서 근무하는 분이 있는데 곧 혼인금지법이 발의될 거라는 거야. 이제 우리나라에선 혼인이 불법이 된다 이 말이야.

혼인이 불법이 되는 게 아니라 혼인으로 발생하는 모든 법적 지위가 무효라는 말이겠지.

B가 대꾸했다.

오, B, 넌 뭔가 아는 게 있구나.

A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예전에 미국에서도 논의 된 적 있다는 걸 읽은 적이 있거든. 누구나 결혼을 할 수 있지만 그 결혼이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뭐 이런 거지.

글쎄 그렇다네. 결혼을 해도 되지만 법적으로 보장받는 게 없다는 거야. 그냥 같이 사는 것뿐이지.

A가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커피나 주문하자고. 하루치 분량을 채워야 하니까.

B가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좀 다른 걸 마셔볼까.

A가 한발 앞서 카운터로 걸어갔다. A는 단 한 번도 B에게 커피 값을 양보한 적이 없다. 늘 병원 법인카드를 꺼내 계산하면서 골프를 치지 않으니까 한도는 넉넉하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의사들 중에서 법인카드 사용 내역이 가장 겸손하다는 것이다. 커피와 담뱃값으로 쓰는 게 다라고 했다. 유흥업소 따위도 출입하지 않으니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동료 의사들이 놀리곤 한다고 했다.

 

A는 커피 마니아에, 골초에다, 뚱보이면서 영화광이었다. 그리고 말쟁이에 상담자였다. A는 건물 주인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B는 카페 주인과 친구의 친구 사이로 약간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B의 습성이었다. 더 가까이도 덜 가까이도 하지 못하면서 약간 어정쩡한 관계를 맺는 것. 만나면 반가운 친구들이지만 일부러 만나지는 않는 딱 그 정도의 관계. A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렇게 지내왔다.

 

이봐, 오늘 내게 권할 만한 새로 만든 커피가 있나.

A가 주인에게 물었다.

아, 그럼 시음용 커피 맛보겠나. 잘 되면 메뉴에 넣을까 하는데.

내가 첫 번째 실험대상인가. 기꺼이 맡아주지.

A가 호기롭게 나섰다.

주인은 서너 가지 커피 이름을 댔다. 커피 이름도 그가 임의대로 지은 것들이었다.

 

이거 왠지 끌리는군, 그랑블루7. 커피가 진하고 풍부할 것 같지 않나. 신비로운 느낌도 좀 들고 말이야.

영화제목처럼 깊은 풍미가 있을 듯 하고.

B가 덧붙였다.

그래, 아주 깊은 심해 느낌이지. 이봐, 주인 그랑블루 봤나.

A가 말했다.

나, 뤽 베송 팬이야. 택시 1, 2, 3, 4, 5 다 봤지.

주인이 대답했다.

니키타는 어쩌고.

B가 거들었다.

와우, 그 여자 정말 쌈박하지. 최근엔 안나가 나와서 설치더군.

난, 청춘 남녀들이 바다 앞에서 파스타 먹는 거 잊을 수가 없어. 소스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스파게티, 흰 면발만 우거적우거적 씹어 삼키는 모습을 정말 기가 막혔어.

A, 정말 영화를 세심하게 보는군.

주인이 말했다.

 

내가 달리 뚱보이겠나. 먹는 건 정말 잊지 않는다고. 근데 파란색뿐인 배경에 흰 면발뿐인 파스타, 다른 어떤 장관보다 뇌리에 남아.

A는 감상에 젖은 듯 말했다.

자, 그럼 그랑블루7을 맛볼까.

B가 A의 등을 밀고 자리로 갔다.

이봐, 주인. 오늘 같이 합석하지 않겠어.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고.

A가 고개를 돌려 주인을 향해 말했다.

 

그랑블루7은 짙은 케냐산 커피에 압생트를 한 방울 떨어뜨린 맛이었다. 진짜 그랬다. 커피에 압생트를 섞은 것이었다. B의 입맛에 그리 맞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지는 않았다. 커피가 풍부한 맛을 내면서도 드라이했으며 마지막에 압생트 향이 머리끝을 자극했다.

 

이거 맛이 야릇한걸. 주인을 불러서 왜 이딴 걸 만들었는지 물어봐야겠어.

A는 그 사이 커피를 다 마시고는 리필하러 갔다. 돌아올 때는 주인과 함께였다.

B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대로 혼인금지법이 발효되면 우리 같은 기혼자들은 어떻게 돼? 아무 상관없잖아, 이미 결혼했으니까.

주인이 물었다.

당장은 그렇지. 7년 동안 유예기간이 주어져. 그 다음부터는 우리도 적용돼. 사실 결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이 법에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A가 대답했다.

 

그럼 뭐가 중요하지?

주인이 다시 물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결혼을 하는 건 아무 상관없어. 남녀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건 지금이나 마찬가지야. 다만 그 두 사람이 결혼했다고 해서 법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하나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게 핵심이지.

B가 대꾸했다.

신청만 하면 지금부터 당장 결혼을 무효화할 수도 있어.

A가 말했다.

그럼 이혼하는 거야?

주인이 다시 물었다.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면서 혼인금지법에 적용받기를 원하는 거야.

A가 대답했다.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면 뭐가 이득이지?

주인이 또 물었다.

 

혼인금지법은 법이 개인에게만 적용된다는 게 핵심이야. 혼인금지법이 이럴 땐 아주 효능이 높지. 만약 자네가 카페를 잘 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망했다고 쳐. 자네는 멀리 도망을 쳤어. 그럼 빚쟁이들이 쳐들어 와서 자네 아내를 괴롭히겠지.

그래, 그래서 위장 이혼을 하는 부부도 많지.

주인이 대꾸했다.

바로 그거야. 그런데 혼인금지법이 발효되면 왜 위장 이혼하지?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돼. 물론 빚은 자네가 계속 갚아야 하겠지만 빚쟁이들이 자네 아내와 아이들을 괴롭힐 수는 없어.

재밌는 법이네. 꽤 쓸 만하겠는 걸.

주인이 미소를 띠면서 소리를 높였다.

글쎄, 아주 흥미롭다니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A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좀 더 말해 봐. 자, 둘이 결혼을 했어. 그럼 이제부터 재산은 어떻게 돼?

주인이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결혼을 하면 우선, 집을 얻거나 사겠지. 남편이 샀으면 남편, 아내가 샀으면 아내 소유야. 돈을 서로 합해서 샀으면 공동명의지. 결혼해서 살다가 갈라서면 집은 원 소유자가 갖는 거지. 재산도 각자 자기 것만 챙겨서 헤어지는 거야. 공동명의로 된 집은 팔아서 지분만큼 나누는 거야. 처음부터 재산을 합친 적이 없으니까 아주 간단하지.

A가 대답했다.

 

맞벌이 부부라면 당연하겠지. 그럼 이런 경우는 어쩌지? 만약 남편이 직장이 있고, 아내는 없어. 남편이 번 돈으로 함께 생활해왔어. 근데 헤어지게 되면? 이혼도 아니니까 위자료도 없고, 재산 분할도 없는데 말이야.

한쪽만 직장이 없고, 다른 쪽은 가사노동을 전담한다고 쳐. 그때는 정부에 가사노동 신청을 하는 거야. 정부는 헤어질 때까지 가사노동에 대한 급여를 지불하는 거야.

근데 그 사람이 가사노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잖아. 퇴직금을 정부에서 주나.

그러니까 혼인금지법과 함께 1인 1직업 법을 발의하게 될 거라는군. 가사노동도 직업군의 하나지. 가사노동을 못하게 되면 실업급여를 신청하면 돼.

정부는 가사노동급여에 실업급여도 지급해야 하고, 직장도 만들어 주어야겠군.

바로 그거야. 국가기업이 창설될 거야. 아주 다양한 형태로.

기업을 만들 자금은 어디서 나오지?

우선 국민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세금을 내지. 부양할 가족도 없으니 개인도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되겠지. 그리고 혼인이 무효니까 당연히 상속도 무효가 돼. 개인의 재산은 개인이 생존할 때만 개인 소유야.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국가에 귀속되고, 그 재원으로 기업도 세우고, 가사노동 급여에, 실업급여도 줄 수 있지. 사실상 개인이 죽는 순간 개인의 재산은 모두 국가 소유가 되기 때문에 재원 마련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국민들의 재산이 상속되지 않고, 모두 국고로 환수된다면 그 돈이 얼마나 될까? 상상할 수도 없을 걸.

와우, 결국 모든 것은 국가 재산이 되고, 개인은 살아 있을 동안만 자기가 번 돈을 자기 것처럼 쓸 수 있는 것이군. 그러니까 소유라는 게 한시적일 뿐이란 것이고 말이야.

B가 말했다.

 

자, 그럼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돼?

자녀가 셋이나 되는 주인이 다시 물었다.

아이를 낳으면 출생 신고를 하지. 부모와 아이의 유전자 정보를 정부에서 기록해. 그리고 그 다음부터 아이는 정부에서 책임지고 기르는 거야.

아이들을 모두 탁아소에 데려다 놓는 건가?

아니, 부모가 집에서 기를 수 있지. 다만 양육비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거야.

부모의 결혼이 무효니까 아이들이 다 사생아가 되는 건 아니고?

아니야, 부모도 있고, 호적에도 올리고, 족보에 쓸 수도 있어. 다만 법적인 지위가 없는 것뿐이야.

정부가 아이들을 책임진다면 어떤 식으로 한다는 거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야. 아이는 집에서 기를 수도 있고, 정부의 공동육아시설에 맡길 수도 있어.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교는 모두 의무 교육이고, 국가에서 담당해. 실력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고. 물론 대학 등록금도 국비로 지불 돼. 의무교육이 아닐 뿐이지. 대학은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 정부가 노동을 보장하니까 대학은 배우는 데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 가려고 하겠지.

부모가 아이들을 좀 더 남다르게 기르고 싶어 하면 어쩌지?

물론 가능해.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 자비를 들여서 국가에서 나오는 양육비 이상을 쓸 수 있고, 사교육을 시킬 수도 있어. 아이를 유학 보내고 싶다면 보낼 수 있고,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 스포츠 다 배우게 할 수 있어. 하지만 공정한 경쟁을 통과해야 할 거야.

어떤 공정한 경쟁이지?

예컨대 이런 거지. 지금까지는 부모의 능력에 따라 생활기록부를 쓸 수 있었어. 청소년 신분으로는 쓸 수 없는 논문을 쓴다든가, 대학이나 기관의 연구소를 빌린다거나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간다든가, 뭐 이런저런 이유로 자녀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스펙을 만들 수 있었고, 그렇게 만든 스펙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이제부터 청소년의 한계를 넘는 스펙은 인정하지 않는 거야. 부모가 아이를 위해 최대한 지원을 하되 아이의 능력이 그것과 함께 가야 한다는 거지.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니까 개개인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체크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겠지. 능력이 되지 않는데 부모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대학에 무혈입성 한다는 식은 이제 불가능해질 거야. 물론 능력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겠지만 아이가 능력이 없는데 부모의 능력으로만으로 잘 되는 아이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도록 하겠다는 거지. 개인은 개인으로 성장하고, 개인으로 살다가 죽는 거야. 생존하는 동안만 능력에 맞는 생활을 하게 돼. 그리고 그것이 좋든 나쁘든 물려줄 수는 없어.

A가 법 집행자처럼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야말로 탈근대로군.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것도 근대산업혁명 이후잖아. 축적한 부를 대대손손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고민한 결과지.

B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부자 가문도, 재벌도 없을 거야. 상속이란 말이 사라질 테니까.

A가 대꾸했다.

금수저, 흙수저란 말도 없어지겠군.

주인이 말했다.

당연하지. 물려받는 게 없으니까.

A가 축배 들듯이 커피 잔을 올렸다가 단숨에 마셨다. A가 떠들어대는 동안 커피는 리필하는 족족 거의 다 식어 있었다.

 

부의 대물림이 모든 불공정의 시초니까 혼인금지법으로 원천봉쇄하겠다는 것이군.

B가 말했다.

그런데 재벌들이 가만히 있을까. 지금도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려고 난린데 말이야.

주인이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재벌의 수는 몇 안 돼. 이 법안은 국민 생활에 밀접한 사안이라 국회를 통과하면 국민투표에 부칠 거야. 서민들의 수가 기득권층보다야 많지.

A가 말했다.

하지만 국회를 통과하기가 어려울 텐데. 국민투표도 쉽지 않을걸.

주인이 말했다.

그렇긴 해. 우리나라 서민들 중에는 분배보다 성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일단 경제가 잘 돌아가야 잘 먹고 잘 산다고 생각하니까.

A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정리를 해볼까.

B가 나섰다. B는 이제 그만 커피나 마시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혼인금지법이 발효되면 결혼을 하더라도 부부는 법적 지위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부부의 공동 재산도 없고, 모든 것이 개인 소유다. 한쪽이 가사를 전담하면, 가사노동 급여를 정부에서 지급한다. 1인 1직업을 원칙으로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직업을 보장한다. 그것이 직장을 통해서든 가사노동을 통해서든. 부모는 아이를 낳아 호적에 등록할 수 있다. 양육에 관한 모든 비용은 정부가 부담한다. 개인은 자신의 소유를 생존 시에만 소유하고, 죽으면 국가에 귀속된다. 상속은 불가능하다. 대충 되었나?

 

오케이. B, 요약 잘 하는군. 중고교 시절에 노트 정리 잘 해서 상깨나 받았겠는 걸. 자, 이제 뭘 좀 먹을까. 갑자기 배가 고프구먼.

A는 케이크를 세 쪽이나 먹었다.

주인은 몇 번씩 커피를 리필 해왔고, 올 때마다 혼인금지법에 대해 궁금한 걸 하나 씩 더 물었다. A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B는 혼인금지법이 혼인을 금지하는 법이 아니라 상속을 못하게 하는 경제법인데도 이 법의 이름을 상속금지법이 아니라 혼인금지법이라고 명명한 입안자들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상속금지법이라고 했다면 발의조차 못하고, 가결되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불멸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흔적이 대대로 남기를 원하는 종족이니까 말이다.

 

상속이 불가능한 세상이 온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미친 듯이 일을 할까. 돈을 더 많이 벌고, 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남겨주기 위해 애쓰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재산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패륜범죄도 줄어들고, 초상집에서 유산을 놓고 싸우는 볼썽사나운 일도 사라질 것이다.

 

공정하게, 자기 능력에 맞게 살다가 죽는 것.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자기의 인생을 오직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만 살 수 있다면 세상이 자신에게만 혹독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줄어들 것이다. 부모가 다른 집 부모보다 못하다고 분노하거나 상처받는 일도 드물어질 것이다. 그런데 정말 법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들떠있는 주인과 A를 보면서 B는 법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상상했다. 그 사람에게만 허락된 법의 문이 있다. 그러나 결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문. 그래서 법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법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자신을 허락한다. 모든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 각각 한 사람에게만.

 

B는 오직 개인뿐이어서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상황을 생각했다. 아내도 가족도 더 이상 책임질 필요가 없고, 빚을 나눠질 필요도, 소유를 나눌 필요도 없는 사회. 누군가를 위해 돈을 벌 필요가 없고, 희생을 요구할 이유도 없는 공동체. 법이 이룬 아주 쿨한 세상. B는 유토피아에 사는 것도 참 심심하고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주고받는 삶, 고통으로 사무치고, 미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삶,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주고받는 삶. 혹 이 법이 이런 삶을 정의의 칼로 죽여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B는 저만치서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혼인금지법이 발의되고, 국민투표에 붙여진다면 B 역시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B는 자신이 그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법이 허락하지 않는 나쁜 것들이 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내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내가 그들에게 행한 씻지 못할 죄악들, 그런 것도 함께 무효화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켕겼다. 아직 벌을 내리거나 용서하는 일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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