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의 폴란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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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드레스덴의 폴란드 여자

by 브린니 2020. 5. 30.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들이 수십 만 죽었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사실 더 많이 죽은 건 우리 폴란드 인이야.

H가 말했다.

군인, 부랑자, 집시, 노인, 아이들, 그냥 남자, 여자들도 떼로 죽었어. 사람이면 다. 종류에 상관없이.

H는 맥주를 마셨고 치즈와 함께 소시지와 당근을 우적우적 씹었다. 모두 독일산이었다.

왜 폴란드 사람들이었지?

B가 물었다.

 

왜냐고? 왜가 어딨어. 사람이 죽는데.

아, 그래? 미안해.

웃기네.

H는 조롱하듯 B를 바라보았다. B는 기가 좀 죽었다.

 

이유라고? 글쎄 폴란드가 독일에 가까워서? 우리가 유태인과 비슷하게 생겼니?

H가 물었다.

B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 살지도 않았고 나치의 심리상태를 아는 것도 아닌데 뭘 어쩌란 말인가.

흔적조차 없애고 싶을 만큼 폴란드인을 증오했나? 왜지? 히틀러라는 예술가 말이야. 참 이상해.

H가 구시렁댔다.

 

B는 예술가들의 미학적 광기가 살인 동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유태인 학살은 수십 년간 이성에 의해 차근차근 준비되었던 것 아닌가. 일본의 난징 대학살이 광기에 의한 것이라면 유태인 학살이야말로 이성이라는 괴물이 저지른 합목적적 행위 아니었던가. 독일이 아니라 전 유럽이 속으로는 유태인을 말살하고 싶어 했고 이를 나치가 실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폴란드인은 왜 그렇게 많이 죽였담.

 

이봐, 젊은 한국 남자.

H가 큰 소리로 B를 불렀다.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데 말이다.

당신은 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지?

H는 정말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독일어 번역하는 Y가 곁에 있었는데 B만 남겨두고 슬그머니 내뺐다.

그런대로 흥미로운 걸, 당신 이야기.

B는 건성으로 말했다.

폴란드인이 죽은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워?

H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테이블에 고개를 떨궜다.

 

H는 폴란드 대사관에서 일한 지 7년이 지나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집시 복장에 노랑머리와 갈색머리가 뒤섞인 헤어, 천을 서너 장 두른 듯한 치마, 군화처럼 생긴, 끈이 다 풀린 부츠, 색색의 팔찌, 커다란 링 귀고리, 그리고 약간 어설픈 매부리코. 유태인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

 

H와 인종만 다를 뿐 집시 여인 풍인 Y는 에이전시에 근무하면서 체코나 폴란드 작가들 중 독일어로 작품을 쓴 몇몇 작가의 책을 번역하고 있었다. 주로 18, 19세기 독일과 체코, 폴란드가 합병과 분리를 되풀이 하던 시기의 작가들이었다. 간간히 2차 대전 후 동독에 거주했던 작가들도 다루었다. H와는 대사관에 협조를 구하러 갔다가 만났다고 했다.

 

H는 몇 분 동안 고개를 처박고 있더니 눈을 똑바로 뜨고 B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서늘했다. H는 Y가 마시다 두고 간 소주병을 들더니 B를 향해 말했다.

원샷?

B는 고개를 저었다.

왜 소주 싫어해?

너무 투명해서.

맥주는?

음… 말하기 곤란한데… 오줌 같잖아.

그럼 뭘 마시지?

탄산음료. 사이다나 콜라 같은 거.

웃기네. 한국 소년. 정말 어린애 같아.

맞아. 탯줄을 목에 걸고 다니지.

오, 미안. 난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어.

B는 H가 왜 아이를 낳지 않을 걸 미안해할까 의아했다.

 

한국 젊은이로서 무슨 생각하며 사니?

공무원 면접에서나 들을 법한 질문이었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외국인이 물으니까 뭔가 사명감을 가지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질문 폴란드인들끼리도 해?

모르지.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봤어. 요즘 애들 아무 생각 없다고 Y가 그래서.

요즘은 재밌는 소설 쓰려는 생각을 해.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

와우. 그런 소설도 있나? 읽으면 다 우울해져서 말이야.

그러니까 세상에 없는 소설을 쓰려는 거야.

의미나 가치는 없어도 돼?

원래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 난.

B가 대답했다. H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소주만 마셨다.

 

폴란드 소설은 우울한가? 폴란드 소설을 읽은 적이 없어서 말이야.

B가 물었다.

폴란드가 축구만 하는 나라는 아니야.

아, 맞다. 쉼보르스카! 그녀 시를 읽은 적이 있어.

그런 걸 왜 읽지? 코리안이.

H는 B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벨상 탔잖아.

H는 B의 머리에서 손을 치웠다.

속물.

 

H라는 폴란드 여자는 인생 전부가 심각해 보였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쓸리는 난파선 위에 서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딱히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투명한 피부에 연하게 푸른 멍이 든, 한없이 위태로운 평온함 같은 이중적인 느낌을 풍겼다.

 

가엾은 폴란드인들은 자기네 의지와 무관하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했다. 커트 보네커트란 미국 작가가 쓴 소설에 나오는 말이야. <제5도살장>이었던가. 우리더러 어릿광대라고. 미친놈. 당신도 그따위 소설이란 걸 쓴단 말이지. 아주 웃기는 소설!

H가 힐난조로 말했다.

B는 어깨를 으쓱했다.

 

히로시마 원자탄 때문에 71,379명이 죽었어. 드레스덴에선 독일인 135,000명이 죽었고. 유태인은 60만 정도일 거야. 독일이 학살한 폴란드 사람은 숫자를 셀 수도 없어. 아마 백만이 넘을 거야.

그렇게나 많이?

2차 대전에서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이 폴란드인이야. 그러니까 어처구니가 없지.

왜 세계사 시간엔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았지?

순위를 매기고 있는 거야?

H가 B를 노려보았다.

 

새벽 3시였다. 드레스덴은 어디일까. B는 계속해서 드레스텐, 드레스덴 하고 되뇌였다. 발음하기 편하고 뭔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ㄷ’ 과 ‘ㅔ’의 반복. 독일어로는 ‘d’와 ‘e’의 반복. 드레스덴은 아주 오래된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유적들로 가득 했으나 미군의 폭격으로 역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십 년간 드레스덴 폭격은 기밀이었다.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는 자랑스럽게 내세우면서도 왜 드레스덴 폭격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을까. 유태인보다 폴란드인이 더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B는 Y가 한번 계산하고 난 뒤 추가로 마신 술값을 계산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폴란드 여자를 처리하는 일만 남았다. 술에 취한 한국 남자들은 택시만 태워서 보내면 어떻게든 집을 찾아들어간다. 과연 폴란드 여자도 그럴 수 있을까.

 

B는 H를 택시에 태우고 주소를 물었다.

드레스덴.

H가 킬킬거렸다.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어릿광대. 못된 미국 작가놈.

 

B는 택시 기사에게 폴란드 대사관 앞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종로구 삼청로 20-1(사간동 70번지). 주한 폴란드 대사관은 특별한 장식도, 경비병도 없는 그저 네모난 건물이었다. 불빛이 없어서 회색빛 외벽뿐 검은 창들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택시에서 내렸지만 H는 자기 집을 찾지 못했다.

 

새벽 공기가 시원하네.

H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은행나무와 그녀가 ‘ㄴ’자를 그렸다. B는 가로등에 기댔다. B는 거울에 비친 ‘ㄴ’ 자를 그렸다. 동이 트려는 것 같았다. B는 집을 찾지 못하는 집시 같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둡고 쓸쓸한 숲속 어딘가 오두막을 숨겨놓고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Y는 어쩌자고 혼자 가 버린 것일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대사관 문이 열리는 9시까지 꼼짝없이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할까. 은행나무와 가로등 사이에서 ‘ㄴ’ 자로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왜 넌 날 호텔로 데려가지 않은 거니?

H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아,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B가 농담조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니?

 

그렇지 않다. 하룻밤을 같이 보낼 만큼 충분히 매력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 뿐이다. B는 Y의 친구를 집에 잘 데려다 주고 싶었다. 그것이 한국식 예의가 아니던가. 외국인에게는 그 나라 식 예의를 적용해야 했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조에 넣어줘.

H가 해맑게 웃었다.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신경질을 부리는 것보다 나았다.

 

B는 택시를 타고 하얏트로 가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객실로 H를 옮겼다. H는 B가 보는 데서 비틀거리며 옷을 벗었다. 옷을 다 벗고도 몸을 가누지 못했다. B는 H를 부축해서 욕조에 내려놓고 물을 틀었다. 물이 차오르는 걸 보고 밖으로 나왔다.

 

하얏트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려다보는 풍경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좋다. 무엇인가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본다는 느낌, 전부를 소유한 느낌, 그게 좋은 것이다. 드레스덴을 폭격한 조종사도 모든 걸 한눈에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유적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도시가 불타는 것까지. 런던을 폭격한 독일 조종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한 비행사도 모두 다 보았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이 순간순간 죽어가며 소멸하는 광경을.

 

B는 문득 H가 떠올라 욕실로 갔다. 거의 머리꼭지까지 물이 찼고 욕조 속으로 몸이 빨려들고 있었다. B는 물을 잠근 뒤 H의 몸을 일으키고 수건으로 감쌌다. 그녀를 들어 침대에 눕혔다. 깡마른 H의 몸은 베개 하나 무게만큼 가벼웠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Y였다.

 

H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아서 당신에게 걸었어.

응, 지금 같이 있어. 하얏트 1107호실. 씻고 방금 잠들었어.

당신이 고생이 많네. 미안. 내가 많이 취했어.

Y, 당신도 H도 다들 정신줄 놓은 사람들 같아.

그러게. 그녀는 3년째 그 상태야. 최근엔 집도 없이 대사관 보일러실에서 살았어. 본국과 연락도 끊기고.

대사관 직원한테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있어?

나도 자세히는 몰라. 폴란드에 있는 유부남 애인에게 메일을 하나 보냈는데 검열에 걸렸나봐.

동구권에선 아직도 검열을 해?

모르지. 공직자들은 그럴 수도. 아무튼 뭐가 잘못 됐는지 작년에 대사관과도 재계약이 안 되고, 그 뒤로 전혀 뒤처리가 안 됐대. 그녀는 그냥 없는 사람이 된 거야.

그 유부남 애인은 뭘 하고 있대? 사람이 이 지경이 됐는데.

6개월 전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대. 하지만 이젠 연락이 안 돼. 그 사람도 이미 공직에서 물러난 것 같고.

도대체 그 메일은 무슨 내용이길래?

그냥 사적인 메일이었대. 그런데 정치적으로 뭐가 읽힌 모양이야? H쪽 문제가 아니라 고위직에 있던 유부남쪽 사람들에게서 말이야.

H는 이제 유령인 셈이군.

그러게. 아무튼 미안해. 나도 H만 만나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돼.

대충 알겠어. 피곤해서 눈 좀 부칠게.

그래. 좀 자. 참, 몇 호라고 했지?

1107호.

곧 갈게.

 

눈을 뜨자 Y가 B를 어머니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또 다른 집시 여자를 보는 게 달갑지 않았지만 드디어 폴란드 여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H는 가고 없었다.

 

폴란드로 돌아가겠대.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갔어. 여권도 갱신하지 못한 상태인데… 뭐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상관없겠지.

Y가 걱정어린 눈빛을 띠며 말했다.

B는 객실을 나와 Y와 로비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며칠 뒤 B는 H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너밖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어. Y는 연락이 안 돼.

 

H는 말을 심하게 빠르게 했는데 내용인즉슨 대사관에서 임시 여권을 받아 폴란드까지 갔지만 입국을 금지 당했다는 것이었다. H는 지금 바르샤바 공항 한복판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H가 걱정하는 것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싶은데 여기서도 입국이 불허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미 여권은 만료되었고, 비행기 타려고 임시로 발급받은 여권은 폴란드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어서 한국에 재입국할 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이때 Y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B는 생각했다.

 

우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 당신이 바르샤바에 있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B가 말했다.

 

36시간쯤 지나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서도 입국이 불가능해. 이제 어쩌지.

H가 인천 공항 공중전화 부스에서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B는 이제 막 독일에서 돌아온 Y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정말 H에겐 보호자가 절실하게 필요하겠구나.

Y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다. H는 지금 폴란드와 한국, 두 나라의 법이 손댈 수 없는 경계에 붕 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법에 기입할 수 없다.

 

이봐, B. 당신이라도 H의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을까?

무슨 소리야. 상황이 이 정도면 오직 하나님만 보호해 줄 수 있다고.

B,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여자에겐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보호자가 되고 싶어도 어떻게 되냐고.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만 보호자는 아니야.

Y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뭐?

B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 말고 남편을 말하는 것인가.

Y, 당장 결혼이라도 하란 말이야?

B가 소리쳤다.

 

Y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왜 도우려는 거니?

Y가 B를 힐난하듯 물었다.

 

왜 돕냐니? H의 사정이 딱해서 도우려는 것 아닌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도우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선한 이웃 노릇 좀 해 보겠다는 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Y 때문에 생각만 더 복잡해졌다.

 

B는 전화를 끊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산책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진정될 것 같았다. 공원을 돌아나오는데 전봇대에 신용회복, 파산 등을 돕는다는 법률회사 광고가 붙어 있었다. 한참을 더 가자 국제결혼, 베트남, 필리핀, 몽고 010-XXXX-XXXX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보았다. B는 광고판을 보자 H를 돕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B는 집으로 돌아와 국제다문화협회로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는데 30분 넘게 걸렸다.

 

입국 심사대에 잡혀 있는 폴란드 여성분을 결혼이라도 해서 입국시키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거의 한 시간 정도 실랑이한 끝에 협회 간사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랬다. 중요한 건 입국이지 결혼이 아니었다.

 

협회에서는 긴 회의 끝에 B를 불러 H를 입국시킬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들은 서류 몇 장을 작성하도록 했고, B의 신원증명을 해당 기관에 의뢰했다. B는 사진을 찍었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면 연락해줄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그리고 사흘 뒤 협회 직원들을 따라 인천 공항으로 갔다. 40분쯤 뒤 입국장을 나오는 H를 볼 수 있었다. 열흘 전쯤 봤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볼이 쑥 들어가 있었다. H는 B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B는 폴란드에서 돌아오는 신부를 맞았다.

 

B는 H와 함께 남산타워에서 저녁을 먹고, 11평짜리 원룸으로 돌아왔다.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없었다. 이제 여기서 폴란드 여자와 살아야 하는 것인가. 공항에서부터 그랬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B는 거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협회 직원은 3년 이내 이혼할 경우 이것저것 조사를 받게 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결혼 생활을 오래 유지하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H는 B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부려놓은 짐짝처럼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용도 폐기된 물건 같았다. 이번 사건의 메인 롤이면서도 사건 밖으로 내몰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보기 딱했다.

 

H는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로 B를 바라보았다. B는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만날 때부터 불편한 눈빛이었다. H는 무엇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 B도 H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선과 시선 사이에 있는 공간들이 어떤 파장에 의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대목에선가 H가 울기 시작했다. B는 짜증이 났다. 왜 우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울고 싶은 것은 정작 B였다. 폴란드 여자와 결혼하다니.

 

H의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폴란드인이 왜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 아니?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정작 이유가 궁금한 것은 다수의 폴란드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 H가 왜 폴란드에 들어갈 수 없느냐, 였다. 자기 나라로부터 입국이 거절된 국민. 폴란드인이지만 더 이상 폴란드 사람이 아닌 예외적인 존재.

 

 H는 이방나라 수도 한복판 11평짜리 방구석에 아무것도 아닌 사물처럼 구겨져 있다. 오직 삶의 불행은 신만이 이유를 아신다. 그러나 신은 입을 꾹 다문 채 우리와 함께, 무능력하게, 고통 받으신다.

 

H는 더 서럽게 울어댔다. 폭력과 모욕을 당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울음 소리였다.

 

그만 울어. 닥치지 않으면 죽도록 패줄 거야.

B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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