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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by 브린니 2020. 5. 28.

B가 A를 다시 만났을 때 B는 수줍은 아이처럼 노트 한 권을 건넸다.

B가 세상에 없었을 때를 기억하며 쓴 것들이었다.

 

감옥에서도 일기를 썼단 말인가?

A가 물었다.

아니, 나와서 그때를 생각하면서 써본 거지.

A는 노트를 받아들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읽은 적 없는 것이겠지.

A가 말했다.

응.

B가 대답했다.

이것 참. 한 사람의 숨겨진 인생을 본다는 게……. 그냥 말로 하면 안 될까.

 

보기 싫다면 이리 줘.

B가 손을 내밀었다.

아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왠지 좀 숙연해져서 말이야.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니어서 말이지.

그냥 커피 한 잔 하면서 읽어보라는 것뿐이야.

그래, 그럼 우선 커피 한 잔 하고, 담배 피면서 천천히 읽도록 하지.

 

 

그는 벽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3년 반이 지났다. 미래로부터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희망은 미래를 끌어당겨서 현재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저 조금 견딜 뿐이다.

 

벽은 커다란 운동장을 갖고 있다. 수천 명이 함께 누울 정도로 넓은데 바깥을 꿈 꿀 이유가 있느냐고 설득한다. 그러나 그가 꿈꾸는 것은 꿈꿀 권리 자체다. 그것은 철저하게 시간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벽은 그에게 한 장소에 머물기를 강요하면서 미래를 차단한다. 그는 상상한다. 풀밭과 숲과 연못과 나무의자가 있었으면. 미래로부터는 그것들이 올 수 없으니 혹시 그런 곳에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아니다. 없다.

 

여기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 기억이 점점 더 가물가물하다. 어디에서 누구와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고자 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이곳은 그에게 완벽한 단절을 제공한다. 왜 이곳에 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람에겐 인생의 어느 시기엔가 자기 자신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겠다, 하고 느끼는 때가 있다. 대부분 청소년 시기인데 성에 눈을 뜨거나 자기가 다른 누구와도 다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때이다. 혹은 신에 대해 경험할 수도 있다. 성직자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의사나 법관이나 교수나 전문직 종사자들도 그렇다. 물론 범죄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몸에다 글귀를 새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착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후 잊지 않기 위해 몸에 새겨놓는다. 완전한 불가능성을 몸에 지닌 채 그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악과 싸운다. 그들이 남을 죽이거나 해치는 것은 언제나 자해일 뿐이다. 자기 인생을 파괴함으로써 자기가 살 수 없는 다른 생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B가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오후 산책 시간이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B는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는 B를 가까이로 부르더니 자기 옆에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B는 엉거주춤 그 옆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운동장 끝 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주머니에서 우유를 꺼내 B 쪽으로 내밀었다. B가 가만히 있자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B는 급하게 손을 내밀어 우유를 잡았다. 그리고 약간 높은 소리로 감사합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약간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부드러웠다. 그가 처음으로 B에게 말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잠시 택배 기사 노릇을 잠시 한 적이 있었는데 가끔 음료수 따위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었지. 고맙다고 말하고 그걸 받아 마셨지. 나는 그들이 누군지 몰랐어. 기억할 수도 없었지. 나는 그들을 잊었어. 되갚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준 것들은 고스란히 선물로 남을 수 있었어. 선물은 아무런 조건도, 어떤 반대급부도 없어야 하고, 결코 되돌려 줄 수 없는 것이어야 하니까 말이야.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B는 여기서 나갈 수 없고, 우유 한 팩도 되갚지 못할 테니까. 우유 한 통이 은혜라니 우스웠다.

 

이보게. 사람들이 여기서 가장 많이 하는 게 뭔지 아나?

그가 물었다.

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부자야. 이것만큼은 가장 많지. 물론 별 쓸모는 없지만.

시간 말씀입니까?

그래. 시간이 남아돌면 다들 뭘 할까?

잡생각이나 들 뿐이죠.

그래, 후회뿐이겠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지. 자넨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다시 태어나도 그건 내가 아닐 테니까요.

좋은 말일세.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생이지.

 

인간은 자기 의지로 태어날 수 없다. 스스로 태어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물로 받은 존재이다. 그것은 되갚을 수 없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증여가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나는 누군가에게서 생명을 받고, 타인의 돌봄에 의해 성장하고, 타인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인생은 되갚을 수도 없는 은혜이다. 인생은 선물이지만 다른 것이 첨부되어 있지 않다. 매뉴얼도 포장지도 덮개도 없다. 그저 실재만 있다.

 

인간은 오직 선물로서만 세상에 온다.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돌려보낼 자격이 그에겐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거부할 수 없다. 어느 원시 부족에서는 선물을 받은 즉시 깨뜨려 버린다. 그래야 돌려줄 수 없으니까.

 

간혹은 인간은 자유를 위해, 사랑을 위해, 행복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다. 아주 가끔은 타인에게 자기의 삶을 선물하는 일도 발생한다. 선물로 받은 목숨을 다른 이의 목숨을 위해 선물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을 살리기 위해 지하철로 뛰어든 한국남자처럼. 그렇다. 선물로 받는 목숨은 선물로 바치는 것이 바람직한 수학 법칙일 수도 있겠다.

 

벽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함부로 대했다. 다른 이에게 주는 법을 몰랐다. 타자가 받은 선물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모두들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루속히 벽 너머로 옮겨지기를 원했다.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가석방 심사에 수차례 떨어지고서도 필사적으로 신청서를 냈다. 이율배반적이었다. 감옥에서 그처럼 여유로운 자가 없는데 밖으로 나가기를 가장 열망하는 사람도 바로 그였으니까.

 

당신 같은 장기수는 가석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 왜 헛된 싸움을 계속하십니까.

B가 물었다.

나는 믿고 있어. 신은 다른 방식으로 정의롭다네.

그가 말했다.

신의 사랑에 기대시는 겁니까.

B가 물었다.

글쎄. 어쩌면 그 말이 가장 적당한 것 같네. 그래, 사랑 말이네.

A가 허탈한 미소를 띠었다.

신은 정의롭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온 자들을 심판했고요. 그러나 신은 그들조차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감옥 밖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신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아주 정의로운 방식으로 형기를 마친 자들을 여기서 내보실 겁니다.

B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좋은 말이군. 거기엔 세속적인 희망이라곤 들어갈 틈이 없군 그래.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멈추고는 다시 벽을 바라보았다. 마치 벽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당분간 헛된 것을 믿고 산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불멸하는 존재이고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영원하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는 거의 신의 영역에 살고 있다. 다른 인간들은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신의 우주에서 오직 사랑이라는 양식만으로 살아간다. 그는 정녕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불멸에 도취하는가. 무기수가 감옥을 둘러싼 벽을 바라보며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아한가.

 

그가 점점 더 허황된 말을 할수록 B는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가석방 심사관이 물었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느냐고 말이야. 사실 이유가 없지. 은총이란 무조건적이니까.

그는 무어라고 더 지껄이려는 듯 하다가 입을 닫고 벽을 응시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들어왔지만 결코 나갈 수 없는 벽. 그것은 원하지 않아도 선물로 받은 인생과도 같았다. 사는 것 자체가 형벌이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그렇게 벽을 바라본다. 그는 행동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나팔이라도 들고 벽을 몇 바퀴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침묵하고 응시하고 갈망할 뿐이었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벽이 사라지고 이 세상의 모든 죄수들은 세상 밖으로 나간다. 다른 세계가 그들을 환영한다. 법과 윤리와 도덕이 없는 세계. 죄와 벌이 없는,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결국 아무도 살 수 없는…….

 

며칠 뒤 두 사람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한 사람은 사형수이고, 한 사람은 들어올 때부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젊은이였다.

 

사람들이 참 용감하네요. 죽을 각오를 하고, 그걸 실행이 옮길 수 있다니.

B가 말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자기 마음대로 죽는 게 뭐 그렇게 용기 있는 행동인지 모르겠네. 나는 끝까지 자유를 쟁취하려고 애쓸 수는 있어도 죽지는 못할 거야. 모욕적으로 사느니 명예롭게 죽겠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요즘 존엄사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는 충분히 잘 살았지만 병이 들었으므로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느니 잘 죽겠다,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는 B를 노려보았다.

 

다들 정말 교만하군. 인간의 존엄이란 스스로 결정하는 게 아니야. 인간을 향해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신의 영역이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발상 자체가 우스워. 그것이 존엄한가? 인간은 스스로 태어나지 못해. 그것은 곧 스스로 죽을 없다는 뜻이야. 스스로 태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위해 스스로 죽겠다고? 그것이야 말로 어불성설이지. 인간이 만약 존엄에 이르고자 한다면 어떤 고통도, 어떤 모욕도 견디면서 그저 끝까지 살아가는 거야.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저 조용히 살다가 이름도 없어 죽어. 그것이야 말로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어. 별것도 아닌 인생을 최선을 살다 죽는 것, 그것이 존엄이야.

 

어느 날 그는 B에게 출구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B가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그저 벽을 바라보았다. 벽 전체가 다 출구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충동으로 빛나는 듯 했지만 이내 멍한 눈길로 그저 벽 한 가운데를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을 더 바라보더니 그가 일어섰다. 벽이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이 아닌 그의 존재를. 인간이 파악할 수도 없는 악의 권유. 그는 처음으로 벽 앞으로 걸어갔다. 거의 벽에 다다랐을 때 그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무어라고 말했다.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B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이미 오래전에 미래는 온다.

 

그는 없는 문을 열고 벽으로 들어갔다. 벽은 그를 삼키고 나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단단하게 서 있다.

 

 

다 읽고 나서 A가 말했다.

두 사람 다 자네인데 굳이 3인칭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었나?

글쎄, 이런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거기서 쓴 게 아니어서 말이야. 그냥 이렇게 써지더라고.

그라는 사람도 없는 인물인가. 진짜 자네가 다 만들어낸 거야?

모르겠어. 나이든 무기수가 몇 있긴 했지.

 

B는 감옥에 있는 내내 고독했다. 거기서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A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더니 커피를 크게 들이키고는 말했다.

 

다음번엔 B, 자네 이야기를 1인칭으로 써주게. 도통 알아먹기 힘들어서 말이야.

B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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