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를 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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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대파를 썰다

by 브린니 2020. 5. 29.

눈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식칼을 두고 망설인다

거침없이 베고 썰 것인가

전투 전에 이슬이 맺힌다

 

생전 처음 아내를 뒤로 물리고 그가 검을 든다

아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했던 과거 때문인가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대단하다

이토록 하찮은 일에 칼을 빼들고 설치다니

그 많은 유혹에 차례로 굴복하고 돌아와서

기껏 파 써는 일에 힘을 쏟는다

 

국 끓일 대파는 동그랗고 잘게 썰어야 한다

육개장처럼 큼지막할 것도 없고 어슷 썰 것도 아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곱게 썰면 그만

그가 썰어놓은 대파는 간격이 멀고

끄트머리도 상한 것이

간당간당한 결혼 생활 같다

 

피 땀 눈물, 마지막 춤을

아내는 BTS 노래를 흥얼댄다

눈이 맵지 않다고 뽑내는 그를 향해

너는 안경 썼잖아

당신은 늘 비겁해

라식한 아내는 눈이 아니라 마음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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