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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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늙음

by 브린니 2020. 5. 27.

 

거칠고 성기던 머리칼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이마가 더 빛나고 너그러워진다

바람이 불면 세차게 뻗쳐오르더니

이제 바람의 반대쪽으로 드러눕는다

 

가시와 엉겅퀴도 뿌리가 다 드러나 기진맥진하고

단단하던 돌들도 부스러진다

푸른 어깨가 파도의 끄트머리처럼 주저앉고

뻣뻣하던 무릎이 고요해진다

 

늙다, 자기 인생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다

수치를 가르치는 나이듦

사는 것이 모욕이라는 것쯤

젊은들 모르랴

 

이가 닳아서 먹을 수 없다

쓴 맛을 느낄 수 없다

행복한 단맛뿐

 

추억이 주는 달콤한 향락 속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상상하며 미래로 빠져든다

늙은 남자에겐 내일이 전부다

 

오늘 잘 살았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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