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니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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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서강준의 트라우마를 대하는 새로운 방식 수많은 드라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의 단초는 트라우마입니다.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 받던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거나 순정적인 연인을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와중에 라는 드라마는 그 배경에서부터 마이너이기를 작정하고 만든 것 같은 신선함이 있습니다. 시골 폐가를 작은 책방으로 만들어 1960~70년대에나 있을 법한 간판에 이라고 쓴 모습부터 레트로 감성을 자극합니다. 역시나 시청률은 저조하여 보는 사람만 보는 드라마였지만, 마니아에게는 굉장히 아름다운 드라마로 기억됩니다. 이 드라마 역시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닌 남녀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 트라우마는 여주인공 박민영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박민영의 아빠는 평소의 다정함과는 달리 분.. 2020. 6. 19.
[명시 산책] 송찬호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송찬호 【산책】 어느 집이나 오래된 추억 같은 물건이 있고, 그 물건에 얽힌 사연이 있다. 할머니의 방은 퀘퀘한 냄새가 나고 누런 자국들로 얼룩이 져 있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에 담긴 추억도 그렇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의 집에서는 아장 오래된 것이 건망증이다.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자꾸 잊는다. 할머니를 추억하는 냄새는 할머니가 꺼내주던 박하사탕의 향기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2020. 6. 19.
[명시 산책]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떠오르면 종들은 소리 없이 걸려 있고, 지나갈 수 없는 작은 길이 나타난다. 달이 떠오르면 바다는 땅을 덮고, 가슴은 무한 속의 섬 같다. 만월 아래서는 아무도 오렌지를 먹지 않는다. 초록빛 찬 과일을 먹어야 한다. 달이 떠오르면 일백 개의 똑같은 얼굴의 달, 은화가 호주머니 속에서 흐느낀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1898-1936) 【산책】 "만월 아래서는 아무도 오렌지를 먹지 않는다. 초록빛 찬 과일을 먹어야 한다." 왜 보름달 밑에서는 오렌지와 같은 주홍빛 과일을 먹지 않고, 초록색 차가운 과일을 먹어야 하는 걸까. 초록빛 찬 과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장 먼저 일어난다. 보름에는 여러 가지 곡식을 먹는다. 보름 음식이 따로 있다. 보름나물과 오곡.. 2020. 6. 19.
[창작 시] 흰 개 흰 개 삼거리 영양탕집 흰 개는 순하다 주차장 한복판에 널브러져 있다가 사람이 가까이 와도 짖지 않는다 자동차가 밀고 들어와도 꿈쩍하지 않는다 흰 개는 무표정하다 사람들이 주인집에 와서 무엇을 먹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흰 개는 손님들의 식탁에 오를 날을 헤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양탕집 주인은 흰 개를 잡지 않을지도 모른다 같은 식구를 팔 수는 없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흰 개는 무심하다 삶과 죽음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게 분명하다 흰 개는 묶여 있고, 더는 달릴 수 없다 흰 개는 조금씩만 먹고, 하품할 때를 빼고는 별로 입을 벌리지 않는다 주인이 개를 잡거나 어디 다른 곳으로 팔거나 흰 개는 저항하지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크게 짖거나, 혹은 울지 않을 것이다 삼거리 영양탕집 .. 2020. 6. 19.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으니라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집니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나 약혼자를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의 원형은 ‘에피뒤메오’로 ‘갈망하다, 욕망하다’의 뜻인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프로.. 2020. 6. 18.
[명시 산책]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아침 시장의 노래> 아침 시장의 노래 엘비라의 아치를 통과해 네가 지나가는 걸 보고 싶다, 네 이름을 알고 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 무슨 창백한 달이 아홉시에 네 뺨에서 피를 거둬갔는가? 누가 눈 속에서 문득 불타는 네 씨앗을 거둬들였는가? 어떤 짧은 선인장 가시가 네 수정水晶을 죽였는가? 엘비라 아치를 통과해 지나가는 너를 나는 보련다, 너의 두 눈을 마시고 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 소리 높이 시장을 꿰뚫으며 나를 징벌하는 저 소리! 옥수수 더미 속의 저 황홀한 카네이션! 네 가까이서 나는 얼마나 멀리 있으며 네가 가버렸을 때는 또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엘비라의 아치를 통과해 네가 지나가는 걸 나는 보련다, 네 넓적다리를 느끼고 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1898-1936.. 2020. 6. 18.
[창작 시] 존버 씨의 일상 존버 씨의 일상 지금 사랑을 잃은 사람은 시를 써라 지난 사랑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지금 불행한 사람은 노래를 불러라 불타는, 장밋빛 인생을 지금 감옥에 있는 사람은 마음껏 울라 태어나서 처음 축구 골대에 골을 넣었을 때처럼 지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래의 행복도 대출되지 않는다 버려지고 불행하고 외로운 지금 이 순간뿐이다 가장 나쁜 것들만 반복된다 절망과 고통... 바이러스... 지금 빈털털이는 지금 병든 자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시를 써라 노래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생은 죽는 날까지 죽지 않는다 아직 살 아 있 다 두고 보자 ! 2020. 6. 18.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두 여자 2001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는 노벨상을 수상한 실존 수학자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것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천재 수학 교수는 아름다운 여제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 같지만, 사실 수학 교수가 늘 이야기하던 대학 친구와 그의 조카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수학 교수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었습니다. 그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무언가 신호가 온다고 믿고 신문이나 책 속에 나오는 숫자들로 뭔가 조합을 하면서 대학 친구와 그 조카의 환영과 대화를 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목욕시키다가도 그 환영에 사로잡히면 미친듯이 숫자를 조합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자기 아들이 물에 빠져 익사할 지경이 되어도 모릅니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그의 아내는 그가 다.. 2020. 6. 17.
[짧은 소설] 버림받은 자의 슬픔 버림받은 자의 슬픔 B가 도착했을 때 카페에는 TOTO의 Africa가 흐르고 있었다. A는 벌써 커피 한 잔을 거의 다 마시고 있었고, 재떨이에는 꽁초가 네 개나 있었다. A는 담배를 피우면서 의료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발을 까닥거리며 토토의 음악에 박자를 맞추면서. 토토가 미국 화장실 변기 만드는 회사라지. A가 말했다. 한때 우리나라 화장실마다 토토 변기를 볼 수 있었어. 난 토토 음악을 좋아했어. 토토라고 하니까 ‘창가의 토토’가 생각나. 빅히트를 친 책이었어. ‘어린 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처럼 어른이나 아이나 다 읽을 만한 책들이 스테디셀러가 되는 것 같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장 소설 같은 느낌의 책들을 좋아하기도 하지. 어린 시절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심리.. 2020.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