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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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명시 산책] 고진하 <빈들> 빈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고진하 【산책】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느낌)이 드는가? 빈들엔 바람만이 불어왔다가 머물지도 않고 흘러간다. 여름과 가을, 그렇게 풍성했던 벌판이, 푸르고 생명력 넘치던 들판이 지금이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양 텅 비어 있다. 그런 빈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텅 빈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에도 빈자리가 있고,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고, 황량하고 고독하다. 어쩌면 당신도, 우리들 모두 마음에 빈곳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고통과 불행을 겪으.. 2022. 12. 17.
[명시 산책] 이병률 <꽃 때> (feat. 길병민) 꽃 때 저 달이 기울면 한 사람이 가네 아직 전하지 못한 맘 눈 감으면 아파오네 꽃 피기도 전에 내 한 사람이 가네 언제 꽃 피면 꽃 보자던 그때 난 기다리네 꽃 때 부를 수도 닿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사람이여 때 아닌 봄날의 눈보라에 무너지듯 숨어버린 이름 이 아픔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처음 사랑이길 내 가슴을 잘라 이 눈물로 묻고 조금 쓸쓸히 꽃물이 들어도 나 괜찮겠네 나 햇살이 되어 저 달을 보내고 꽃잎 시들어 쌓이는 이때를 나 견디겠네 꽃 때 ―이병률 【산책】 저 달이 기울면 한 사람이 가네 아직 전하지 못한 맘 눈 감으면 아파오네 달을 보면서 추억에 잠기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인가보다. 달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달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2022. 11. 29.
앙드레 지드 <쇼팽노트> 앙드레 지드는 , 등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또한 그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제자들을 레슨할 정도로 수준 높은 연주자였다. 그는 리스트와 쇼팽 등을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는 쇼팽을 매우 사랑한 것 같다. 그래서 쇼팽을 어떻게 이해하고 쇼팽의 피아노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며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이해한 쇼팽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사람들이 쇼팽을 리스트처럼 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교파 연주의 달인이라면 리스트 곡에서 적어도 애착할 만한 부분, 홀딱 반할 만한 면을 발견한다. 그런 기교파 피아니스트의 실력으로 리스트는 그냥 ‘따라 잡힌다’. 그런데 쇼팽은 그런 연주자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 빠져나가도 아.. 2022. 11. 28.
[명시 산책] 찰스 부코스키 <첫 숨에 산산조각> 첫 숨에 산산조각 남은 날들은 부족한데 이른 아침 햇살에 난간이 반짝인다. 우린 꿈에서조차 쉴 수 없을 거야. 이제 해야 할 일은 조각난 순간들을 다시 맞추는 것 생존이 승리처럼 느껴질 때 행운은 가냘프다 죽음을 향한 혈류보다 더 가냘프다. 인생은 서글픈 노래. 너무 많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너무 많은 얼굴 너무 많은 몸뚱이가 보인다. 최악은 그 얼굴들. 그것은 아무도 이해 못 할 질펀한 농담. 당신의 두개골 안에는 야만적이고 무의미한 날들뿐. 현실은 즙이 없는 오렌지. 계획도 없고 탈출구도 없고 신성함도 없고 기뻐하는 참새도 없구나. 우리의 인생이 그 무엇에 비견될 수 있으랴. 그래서 전망이 난망한 게지. 우리의 용기는 비교적 부족한 적은 없었으나 승산은 최고일 때도 요원했고 최저일 때는 철벽이었다. 최.. 2022. 11. 9.
[명시 산책] 보르헤스 <비> 비 가랑비가 내리니 갑자기 오후가 갠다. 내리다인지 내렸다인지. 분명 비는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지. 빗소리를 듣는 이는 그지없는 행운이 장미라 부르는 꽃과 유채색 신기한 색조를 현현시켰던 그 시간을 회복하였네.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이 비가, 상실된 아라발의 지금은 가 버린 어느 정원 포도 덩굴 검붉은 알갱이에 생기를 돋우리. 젖은 오후는 내가 갈망하던 목소리, 죽지 않고 회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돌려주네. ―보르헤스 【산책】 흐렸던 하늘이 잠시 비가 내리니까 곧바로 환하게 밝아온다. 봄날 혹은 가을날 오후에 이런 현상은 자주 때론 가끔 볼 수 있다. 카페 창밖으로 혹은 거실 창을 열고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거나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옛 기억이 떠오르고 기억의 끝을 좇아 회상에 잠기곤 한다. 장미와 다.. 2022. 11. 7.
[명시 산책] 게오르크 트라클 <고독자의 가을> 고독자의 가을 어두운 가을이 가득 품고 돌아오는 열매와 풍요, 이는 누렇게 바래버린,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광채. 순결한 푸름이 퇴락한 껍데기에서 튀어나오고; 새들의 비행에서는 오래된 전설의 소리가 난다. 포도주는 이미 빚어졌으니, 부드러운 고요는 어두운 물음들에 대한 조용한 답변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외딴 언덕에 꽂혀 있는 십자가; 붉은 숲에서 양 떼 하나가 길을 잃는다. 구름은 호수의 거울을 스치며 지나가고; 농부의 차분한 몸놀림 또한 쉬고 있다. 아주 조용히 저녁의 푸른 날개가 어루만지는 메마른 초가지붕, 시커먼 흙. 머지않아 피로한 자의 눈썹에 별들이 둥지를 튼다; 서늘한 방에는 고요한 만족감이 찾아들고 천사들이 저버리는 푸른 눈들은 부드럽게 고통받는 연인들의 것.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 .. 2022. 11. 5.
[명시 산책] 김소월 <진달래꽃> (feat. 길병민)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김정식) 1902~1934 【산책】 봄마다 산에 들에 길가에 담벼락 곁에 어느 곳 어디 사방천지에 피어나는 꽃 분홍빛 붉은 입술 발그레 달아오른 볼(뺨) 핑크―사랑(하트)의 빛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빛깔의 꽃! ★ 진달래꽃을 노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시는 어쩌면 이별 노래가 아닌 사랑의 시가 아닐까. 이어령은 이 시가 미래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현재는 그 내용이 정반대로 읽힌다고 말했다. 문장의 시제가 미래형이든 현재형이 상관없이 소월.. 2022. 10. 13.
[명시 산책] 김행숙 <아침에 일어나는 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 거의 잊혀진 것 같다 머리 하나를 두고 온 것 같다 머리가 두 개인 사람처럼 머리를 일으켰다 모든 게 너의 착각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헤어질 때 당신이 한 말 두 명의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서 간신히 한 사람만 안아 일으켰다 라디오 스위치를 켜고 어제와 똑같은 아침 방송을 들었다 ―김행숙 【산책】 아마도 실연을 당한 뒤의 삶에 대해 쓴 시 같다. 모든 게 너의 착각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헤어질 때 당신이 한 말 오해는 늘 큰 불상사를 일으킨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차갑게 돌아섰을 때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이유를 알기 위해 애쓰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잘 잊는 것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돌아섰.. 2022. 8. 14.
[명시 산책] 조용미 <알비레오 관측소> 알비레오 관측소 알비레오 관측소에 가서 별을 보고 싶은 두통이 심한 밤이다 거문고자리의 별을 이어보면 이상하게도 물고기가 나타나는 것처럼 지금의 나를 지난 시간의 어느 때와 이어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 그걸 보려면 더 멀리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멀리 갔다 되돌아와도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지금은 단지 고열에 시달리고 있고 생의 확고부동과 지루함에 몸져누웠을 뿐이다 입술이 갈라 터진 것뿐인데 아는 말을 반쯤 잃어버린 것 같다 아무래도 좀더 먼 곳에서, 거문고자리의 물고기를 발견하듯 이 두통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일치하기 힘든 몸이고 살이다 알비레오 관측소까지 가야만 하는 고단한 생이다 아주 멀지는 않다, 두어 번 더 입술이 터지고 신열을 앓다 봄의 꽃잎처럼 아주 가벼워지면 될 것을 몸이.. 2022.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