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37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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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좀머 씨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이 하루 종일 바삐 걸어다닙니다. 비 오는 날이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건 폭풍우치는 날이건 그는 항상 무언가로부터 쫓겨 다닙니다. 그 모습을 한 소년이 바라봅니다. 소년의 시점으로 씌어진 이 소설의 화자는 작가 자신 파트리크 쥐스킨트입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유대인에 대한 만행으로 인해 처참하게 정체성이 무너져내린 때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강한 긍지와 정체성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살아갈 힘이 있을 텐데, 유대인에 대한 잔인한 가해자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을 산산히 부서뜨리고 살아갈 힘을 잃게 했습니다. 어쩌면 어린 쥐스킨트의 눈에 비친 좀머 씨의 모습은 무언가로.. 2020. 6. 5.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겨울 물고기> 물고기는 겨울에도 산다. 물고기는 산소를 마신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눈으로 얼음장을 헤치며. 저기 더 깊은 곳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물고기는 떠오르고 싶어한다. 물고기는 빛 없이도 헤엄을 친다. 겨울의 불안한 태양 밑에서. 물고기는 죽지 않으려고 헤엄을 친다. 영원히 같은 물고기의 방식으로.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빙괴(氷塊) 속에 머리를 기대고 차디찬 물속에서 얼어붙는다. 싸늘한 두 눈의 물고기들이. 물고기는 언제나 말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고기에 대한 詩도 물고기처럼 목구멍에 걸려 얼어붙는다.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1940-1996) 【산책】 역사나 정치, 권력 등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들은 이 시를 읽으며 .. 2020. 6. 3.
[명시 산책] 자끄 프레베르 <메시지>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연 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 자끄 프레베르(프랑스, 1900-1977) 【산책】 왜 시의 제목이 메시지일까?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일까? 이런 질문부터 시작한다면 시와 함께 산책하기엔 좀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메시지, 뜻, 의미, 해석, 비평, 이런 것들을 집에 놔두고 가볍고 홀가분하게 산책을 시작해보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등 뒤로 문을 닫고. 전봇대 앞에서 만난 길고양이를 쓰다듬어 보라. 음식물 쓰레기장에서 누군가 깨물어 먹고 버린 사과를 볼 수 있으려나. 걷.. 2020. 6. 1.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겨울 결혼식> 겨울 결혼식 나는 1월에 혼례를 치르었다. 마당에는 하객들이 들끓었고 산마루 교회의 종은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혼례용 제단에서 행길의 두 끝이 보인다. 나는 파발꾼이 돌이키지 못하도록 저 멀리 시선을 던진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의 신랑은 나를 바라본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이 수많은 촛불들! 나는 그 초들을 세고 있다.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7년 作 시를 읽는다. 산책하듯이. 아무런 마음의 짐도 없이. 춤을 추듯 걷는다. 바람을 맞듯, 새소리를 듣듯, 언어들이 들려주는 향기를 느낀다. 인생의 냄새들, 사람 마음의 속삭임, 툭툭 건네는 사랑의 장난. 시를 읽는 것은 이런 느낌들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러시아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 은 정말 아.. 2020. 5. 31.
헤르만 헤세 <데미안> 데미안은 누구일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작가의 의도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선교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면서 인도 여행을 통해 동양의 종교와 가치관을 접했습니다. 기독교 가치관과 동양 종교의 가치관을 동시에 접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가설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비해서 동양의 세계관은 윤회를 바탕으로 한 원형적 세계관이며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탄생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생명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전적으로 선한 신이며 악한 마귀를 굴복시키는 속성을 갖지만, 동양의 신은 그 자체로 선과 악을 함께 내포하여 생명과 탄생, 죽음과 파괴가 반복되는 영원 회귀.. 2020. 5. 29.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흔히 독서모임을 하면 밀란 쿤데라의 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냐? 만약 전자라면 책 속에서 어떤 인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인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일반적인 인간 존재가 너무나 가벼워서 참을 수 없다는 철학적 사변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논쟁에 대해 해결도 보지 못한 채 흔히 독서모임의 주체들은 또 이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책 속 인물 중에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볍게 살았다. 그러나 테레자는 무겁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토마시는 아들마저 내팽개친 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하면서 어떤 책임있는 행동도 하지 않.. 2020.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