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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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by 브린니 2020. 6. 5.

좀머 씨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이 하루 종일 바삐 걸어다닙니다. 오는 날이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건 폭풍우치는 날이건 그는 항상 무언가로부터 쫓겨 다닙니다.

 

모습을 소년이 바라봅니다. 소년의 시점으로 씌어진 소설의 화자는 작가 자신 파트리크 쥐스킨트입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1949 독일 암바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독일은 2 세계대전의 패배와 유대인에 대한 만행으로 인해 처참하게 정체성이 무너져내린 때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강한 긍지와 정체성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살아갈 힘이 있을 텐데, 유대인에 대한 잔인한 가해자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을 산산히 부서뜨리고 살아갈 힘을 잃게 했습니다.

 

어쩌면 어린 쥐스킨트의 눈에 비친 좀머 씨의 모습은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면서 살아갈 힘도 이유도 목적도 명분도 없는 독일 전후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가 폭풍우 치는 , 폭풍우 속에서도 들판을 헤매고 있는 좀머 씨에게어서 차에 타시오. 그러다 죽겠소.”라고 말한 것처럼 좀머 씨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당위의 말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말은 좀머 씨에게 더한 고통입니다. 자신이 자기 자신을 견딜 없을 만큼,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 만큼 정체성이 무너졌는데,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이 없는데,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쩌면그러다 죽겠소라는 말은 일종의 심판과 같습니다. 이미 정체성의 죽음을 죽어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을 만큼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이제 남은 다가올 심판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사회적, 정서적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 남은 죽음은 이제 육체적 죽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소년도 죽으려고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몸보다 자전거를 타야만 했기에 운전이 힘들어 피아노 학원에 늦을 수밖에 없어서 지각했다고 모욕을 당한 데다가 누군가 다른 아이가 피아노 건반 하나에 코딱지를 붙여 놓아서 더러워 피아노 연습을 건반을 눌렀다가 선생님에게 심한 모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놈의 낡고 커다란 자전거 때문에, 그놈의 코딱지 때문에, 이렇게 심한 모욕을 당해야 하다니…… 억울하고 비참해서 그만 죽음으로 자신을 모욕한 자들에게 벌을 주고 싶었던 소년이 나무 위에 올라가 떨어지려는 찰나, 하필 나무 밑으로 좀머 씨가 걸어들어왔습니다.

 

좀머 씨는 누군가의 감시를 피하려는 사람처럼 주위를 살피며 가방에서 빵과 물을 꺼내어 우물우물 먹은 또다시 서둘러 어디론가 바삐 걸어갑니다.

 

소년은 좀머 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죽기를 포기합니다. 자신의 비참은 좀머 씨의 비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은 소년이 죽으려는 죽음은, 좀머 씨가 평생 피해다니며 사는 것처럼 더욱 비참해지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짜 비참과 공포의 모습을 좀머 씨에게서 발견한 소년은 이후 호수에서 좀머 씨가 자살할 유일한 목격자가 되지만, 차마 좀머 씨를 말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합니다.

 

소년은 그에게 죽음이 안식처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제발 자기를 내버려둬 달라는 그의 외침의 무게를 소년은 인정하며 조용히 그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독일의 전쟁 세대는 그렇게 해법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후에 태어나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삶의 코딱지 같은 문제들 때문에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욕을 당해도 그래서 화가 나고 죽고 싶어도 그들은 앞선 세대가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참하게 살아다 죽어갔는지 보았고,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파크리크 쥐스킨트는 생각하는 지성으로서 무너진 정체성을 다시 찾아내기 위한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지 모릅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빛이 새어들어오는 출구가 보이듯이 그가 살아간 시대의 출구 끝에 그가 다다를게 될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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