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고트브리트 벤 <과꽃>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고트브리트 벤 <과꽃>

by 브린니 2020. 6. 7.

과꽃

 

 

 

과꽃―, 팽창된 날들,

해묵은 맹서, 마력,

신들은 머뭇거리는 시간을

천칭 저울에 갖다 댄다.

 

또 한번 금빛 가축의 무리

하늘, 빛, 꽃핀 한 철,

무엇이 이 케케묵은 생성을

죽어 가는 날개 아래 보듬고 있는가?

 

또 한번 금빛 가축의 무리

도취, 장미의 그대―

여름은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제비들이 날아가는 쪽을 바라보고 있고,

 

또 한번 추측,

이미 확실한 곳에서,

제비들은 물결을 스쳐 나르며

여행과 밤을 마시고 있다.

 

                           ― 고트브리트 벤 (독일, 1886-1956)

 

 

【산책】

“신들은 머뭇거리는 시간을 천칭 저울에 갖다 댄다.”

머뭇거리는 시간은 여름에서 가을로 변화하는 시간을 말한다.

여름은 온갖 꽃들과 나무들을 갖고 살았다. 멋지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가을은 빈곤하다. 가을은 스스로 가난해지는 시간이다.

가을은 풍요로웠던 지난날을 추억하는 시간이다.

 

많은 것을 갖고 있던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많은 재산을 갖고 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헐벗은 채 먼 길을 떠나야 한다면?

아마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머뭇거릴 수밖에.

그래서 여름은 비스듬히 기대서서 제비가 가는 쪽, 가을을 바라본다.

 

과꽃의 학명 ‘Callistephus'는 그리스어의 'kallos(아름답다)'와 'stephos(화관)'의 합성어이다.

관모가 겹으로 발생하여 아름답다고 이름 붙여졌다.

여름이 한창인 7월부터 가을이 오는 9월 사이에 핀다.

이 시간대에 신들은 머뭇거리는 시간을 저울에 달아본다.

과연 온 만물이 무성한 여름 쪽일까, 아니면 점점 텅 비어가는 가을 쪽일까.

신들의 시선에서 볼 때 어느 계절이 더 풍요로울까.

 

시인은 단순히 꽃을 보며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본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데리고 오는 정신의 여러 조각들을 흩어 놓는다.

해묵은 맹세들, 마력, 도취, 꽃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살리는 촉매 역할을 한다.

 

우리 노래에는 과꽃을 좋아하던 누나를 그리는 소년의 마음이 있다.

시집 간 지 3년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는 누나.

가을이 오면, 길가에 핀 과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그래서 과꽃은 가을로 가기를 머뭇거린다.

꽃이 다 지면 마치 그리운 사람의 얼굴도 잊혀질 것처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