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3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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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명시 산책] 한강 <파란 돌> 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 2020. 6. 20.
[명시 산책] 송찬호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송찬호 【산책】 어느 집이나 오래된 추억 같은 물건이 있고, 그 물건에 얽힌 사연이 있다. 할머니의 방은 퀘퀘한 냄새가 나고 누런 자국들로 얼룩이 져 있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에 담긴 추억도 그렇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의 집에서는 아장 오래된 것이 건망증이다.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자꾸 잊는다. 할머니를 추억하는 냄새는 할머니가 꺼내주던 박하사탕의 향기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2020. 6. 19.
[명시 산책]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떠오르면 종들은 소리 없이 걸려 있고, 지나갈 수 없는 작은 길이 나타난다. 달이 떠오르면 바다는 땅을 덮고, 가슴은 무한 속의 섬 같다. 만월 아래서는 아무도 오렌지를 먹지 않는다. 초록빛 찬 과일을 먹어야 한다. 달이 떠오르면 일백 개의 똑같은 얼굴의 달, 은화가 호주머니 속에서 흐느낀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1898-1936) 【산책】 "만월 아래서는 아무도 오렌지를 먹지 않는다. 초록빛 찬 과일을 먹어야 한다." 왜 보름달 밑에서는 오렌지와 같은 주홍빛 과일을 먹지 않고, 초록색 차가운 과일을 먹어야 하는 걸까. 초록빛 찬 과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장 먼저 일어난다. 보름에는 여러 가지 곡식을 먹는다. 보름 음식이 따로 있다. 보름나물과 오곡.. 2020. 6. 19.
[명시 산책]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아침 시장의 노래> 아침 시장의 노래 엘비라의 아치를 통과해 네가 지나가는 걸 보고 싶다, 네 이름을 알고 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 무슨 창백한 달이 아홉시에 네 뺨에서 피를 거둬갔는가? 누가 눈 속에서 문득 불타는 네 씨앗을 거둬들였는가? 어떤 짧은 선인장 가시가 네 수정水晶을 죽였는가? 엘비라 아치를 통과해 지나가는 너를 나는 보련다, 너의 두 눈을 마시고 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 소리 높이 시장을 꿰뚫으며 나를 징벌하는 저 소리! 옥수수 더미 속의 저 황홀한 카네이션! 네 가까이서 나는 얼마나 멀리 있으며 네가 가버렸을 때는 또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엘비라의 아치를 통과해 네가 지나가는 걸 나는 보련다, 네 넓적다리를 느끼고 그리고 울기 시작하기 위해.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1898-1936.. 2020. 6. 18.
[명시 산책] 칼 크롤로브 <나를 위한 풍경> 나를 위한 풍경 1 그 속에 광물질과 형용사를 모을 것 나무 그림자들은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다 한낮은 그 속에서 기하학적인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먹는다 나의 풍경은 바람처럼 배고프게 한다 팔이 긴 사람은 하늘을 만질 수 있으리라 지친 새들은 허공에서 잠을 잔다 습관적으로 색색가지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기나긴 황혼의 전설 밤은 불탄다 : 쌓아 놓은 목탄 2 연기구름의 믿을 수 있는 아름다움 확신은 지평선에 메아리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버들가지의 사분의 일 박자의 멜로디 : 일어나는 소음들은 나방의 날갯짓처럼 사라진다 어제 유클리드가 정돈해 놓은 검은 올리브의 들판 나는 그 들판이 내 눈 앞에서 마른 빛 속에 어른거리게 한다 3 소금기어린 바닷가에 비치는 작은 배 젖은 장미의 냄새가 난다 : 죽.. 2020. 6. 17.
[명시 산책]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마르고 푸른. 얼굴 예쁜 아가씨가 올리브를 주우러 간다. 탑들에 구혼하는 바람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잡는다. 네 기사가 지나갔다 안달루시아 조랑말을 타고, 하늘색과 초록 옷을 입고, 길고 검은 외투를 걸치고, “코르도바에 한번 와요, 아가씨” 아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젊은 투우사 셋이 지나갔다, 날씬한 허리에 옷은 오렌지빛, 고풍스런 은빛 칼을 차고, “세비야에 한번 와요, 아가씨” 아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저녁이, 퍼지는 빛 속에 자줏빛으로 물들자. 젊은이 하나 지나갔다, 장미와 달의 도금양을 가지고, “그라나다에 한번 와요, 아가씨” 그러나 아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얼굴 예쁜 아가씨는 여전히 올리브를 줍고, 바람의 회색 팔은 그녀의 허리를 휘감.. 2020. 6. 16.
<바가바드 기타> 함석헌 주석 힌두교 경전에는 등이 있는데, 나 는 전문 지식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 반면, 는 하층 천민들에 대한 해탈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간디는 이 책을 외우기 위해서 아침마다 한 절씩 써붙여 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속으로 외웠고,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는 서양의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신약성경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말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본래 라는 인도 서사시의 제6권에 속하며, 전쟁 준비를 하던 아르주나 왕자가 그의 마부이자 스승인 크리슈나와 대화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전쟁을 앞둔 아르주나 왕자는 고뇌합니다. “크리슈나님, 나는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다 원치 않습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2020. 6. 15.
[명시 산책] 칼 크롤로브 <연가> 연가 1.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녹색의 굵은 호두를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밤에 껍질을 벗긴 듯 말간 풍경 속에 물고기와 나뭇잎의 향기나는 풍경 속에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푸른 우유 속의 두 개의 머루 같은 너의 눈이 성냥불빛 속에 비친다 느릅나무 그림자 속의 둥근 달은 부드럽게 비추이지 않는다 달은 낡고, 닳았고, 바람에 부숴져 모래시계처럼 우울하게 흘러내린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침묵의 철자들을 나열해 본다 바람 없는 추위 속에 매운 상치냄새를, 너의 입을,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 조각처럼 녹아드는 새벽 여명 속에 사실적으로 되어가는 밤을 철자로 읽어 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2. 너는 가버리고…… .. 2020. 6. 15.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저녁에> 저녁에 눈이 건초를 뒤덮었다 천장 밑 틈바귀를 통하여. 나는 건초를 휘저어 놓았다 그때 나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나비여, 나비여. 그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보존해 냈다. 건초 곡간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하며 겨울을 난 것이다. 나비는 건초더미에서 나와 두리번거린다. 마치 이성을 잃은 박쥐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통나무 벽이 낯설다는 듯이. 나는 나비를 얼굴 가까이 가져와서 그의 꽃가루를 본다 불보다도 선명하고 나 자신의 손바닥보다 분명한 그 꽃가루를.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우리 단 둘만이 여기 있다. 그리고 나의 손가락은 따사롭다. 6월의 나날처럼.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5년 作 【산책】 이 시는 ‘겨울 물고기’에 이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봄이 되었다. 겨우내 묵었던 .. 2020.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