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36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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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장미> 장미 난 안다. 여기 내 손에 너, 차가운 장미를 갖고 있음을. 태양의 나약한 광선이 나신으로 네게 도달한다. 네게서 냄새가 난다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 순간 나를 속이는 너의 차디찬 냉혹함은 어디로부터? 아름다운 비밀 왕국 그곳으로부터 넌 자신의 향기를 퍼뜨린다 행복에 겨운 네 유일한 공기들, 불들, 향수들이 하늘에 침입하기 위해서? 아, 거기엔 네가 도취되는 천국의 창조물만이 있구나! 하지만 이곳에는 차가운 장미, 네가 움직임 없이 비밀스레 있다. 네 형상이 꾸며놓은 창백한 작은 장미.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898-1984) 【산책】 장미의 계절이다. 곳곳에 장미가 피어 있다. 아파트 담벼락에도, 부잣집 정원에도, 관공서에도, 공원 한 편에도, 도로 갓길, 버스정류장에도. 예전에는 .. 2020. 6. 13.
[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창조의 복부> 창조의 복부 복부가 커지고 있다. 사리함의 진흙도 없이 빛들이 성장한다, 구른다 단련한다. 불타오르는 복부. 물질 중에선 오직 빛만이 불의 물질. 인간이 서서히 태어난다. 한 점, 한 점만으로. 은하수의 본원, 형체 있는 별들이 계승된다. 형체 갖춘 것들이 형상을 요구한다, 얻는다, 내보인다, 노래부른다. 인간은 단지 심심풀이로 내던져진 한 움큼의 빛 세포. 이토록 투명한 복부. 거기에는 눈, 입, 발, 장미가 스며 나오고 맑은 향기 소리,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그 복부, 행복한 사리함이 밤에 순회하며 하늘, 수세기를 거슬러 지나간다. 오, 거의 영원한 인간다운 달, 근원, 무덤과 성배를 흐르는 달. 넌 항상 가장자리까지!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898-1984) 【산책】 빛이 부풀어 오르.. 2020. 6. 12.
노발리스 <푸른 꽃> 푸른 꽃은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는 그리움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불태워줄 연인이 푸른 꽃으로 꿈속에 피어날 것입니다. 회사 일에 지친 직장인들은 못 다 이룬 젊은 날의 파릇한 꿈이 푸른 꽃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빚에 쫓겨 허덕이는 사람은 1등 번호를 담은 로또 한 장이 가슴속에서 꺾을 수 없는 푸른 꽃으로 피어있을지 모릅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노발리스의 가슴속에 푸른 꽃으로 핀 것을 무엇일지,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재미난 추리소설도 아니고, 흥미있는 스토리가 펼쳐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것도 아닌데, 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읽는 이의 마음에도 안개 속 희망처럼 피어있는 그리움의 푸른 꽃 때문입니다. 관념론으로 가득한 독일 지성의 .. 2020. 6. 11.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장벽을 쌓고 나서> 장벽을 쌓고 나서 사람들과의 장벽을 쌓고 나서 나는 나 자신과의 장벽을 쌓고 싶어졌다. 그것은 손도끼로 깎아낸 나무 울타리는 아니다. 여기서 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거울이었다. 나는 두루 바라본다 ― 침울한 생김새를, 뻣뻣한 머리털을, 턱 위의 군살들을 어쩌면 이혼한 부부의 삼면경(三面鏡)이 가장 좋은 장벽일지 모르지 창문에 비친 황혼이 커다란 찌르레기가 사는 경작지와 담벽에 뚫린 파열구 같은 호수 ― 톱니모양의 전나무로 둘러싸인 호수가 그 속으로 기어든다. 조심해라, 호수의 뚫린 구멍으로부터 그 어떤 웅덩이를 거쳐 외부세계가 이곳으로 기어들지도 모르니. 아니면 그 외부세계는 밖으로 기어나갈 것이다.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6년 作 【산책】 산책은 봄이나 가을에 하기 좋다. 깊은 가을밤의 산책이 .. 2020. 6. 11.
[명시 산책] 고트브리트 벤 <시> 시 일찍이 신성이, 깊고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어떤 피조물 속에서 부활해 말했던 바, 그것이 곧 시이지, 왜냐하면 그 속에는 무한히 마음의 고통이 누그러져 있기 때문이지. 마음은 이미 아득한 흐름 속에 헤매인 지 오래이지만, 시절詩節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민족들의 싸움을 뛰어넘고 권력과 살인 동맹보다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지. 한 조그마한 종족, 이미 오래 전에 백인의 탐욕에 의해 정복당한 인디안들, 아즈텍 말을 쓰는 야스키 족들이 부른 노래들도 조용한 농요農謠로서 줄기차게 살아 있지 : 행로를 안으로 갈앉혀, 정신에 멍에를 씌우고 있는 자의 그 위대한 중얼거림, 들이쉬는 호흡, 내쉬는 호흡, 멈추는 호흡 ― 인도 고행승과 탁발승의 호흡의 종류―, 침묵에 몰두하는 누구나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그 위대.. 2020. 6. 10.
[명시 산책]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시골에서 하나님은> 시골에서 하나님은 시골에서 하나님은 조소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집 한 구석에 사는 게 아니다. 그분은 가는 곳마다 살고 계신다. 그분은 지붕과 식기를 정결히 하고 집집마다 공정히 절반씩 나누어 주신다. 시골에 하나님은 남아돌 정도로 많이 계신다. 그분은 토요일마다 주철제 솥에 등나무 콩깍지를 끓이고 졸린 듯한 표정으로 불 위에서 춤을 추듯이 발을 놀린다. 그러고는 목격자인 나에게 눈짓을 하신다. 그분은 담장을 쌓고, 처녀를 산림지기에게 시집보내고 오리를 쏘는 순라군의 총알이 영원히 빗나가도록 장난을 하신다. 가을의 거센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시골의 한 무신론자에게 허용된 단 하나의 유일한 행복이리라. ―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1964년 作 【산책】 신은 어디에나 .. 2020. 6. 9.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정치철학 수업에서 마이클 샌델이 강의한 내용을 녹취한 이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10년 이후에 한국에서도 ‘정의’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너무나 유명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책의 페이지를 열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입장과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시장 자유주의의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마이클 샌델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라가며 읽게 됩니다. 마이클 샌델은 강한 장단점을 갖고 있는 두 가지 사상체계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칸트의 도덕 원칙과 존 롤스의 평등 원칙,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개념 등을 차례로 살펴나갑니다. 결국 마이클 샌델은 중용의 덕을 강조하며 모두에게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공동선을 추구해.. 2020. 6. 7.
[명시 산책] 고트브리트 벤 <과꽃> 과꽃 과꽃―, 팽창된 날들, 해묵은 맹서, 마력, 신들은 머뭇거리는 시간을 천칭 저울에 갖다 댄다. 또 한번 금빛 가축의 무리 하늘, 빛, 꽃핀 한 철, 무엇이 이 케케묵은 생성을 죽어 가는 날개 아래 보듬고 있는가? 또 한번 금빛 가축의 무리 도취, 장미의 그대― 여름은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제비들이 날아가는 쪽을 바라보고 있고, 또 한번 추측, 이미 확실한 곳에서, 제비들은 물결을 스쳐 나르며 여행과 밤을 마시고 있다. ― 고트브리트 벤 (독일, 1886-1956) 【산책】 “신들은 머뭇거리는 시간을 천칭 저울에 갖다 댄다.” 머뭇거리는 시간은 여름에서 가을로 변화하는 시간을 말한다. 여름은 온갖 꽃들과 나무들을 갖고 살았다. 멋지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가을은 빈곤하다. 가을은 스스로 가난.. 2020. 6. 7.
[명시 산책] 자끄 프레베르 <새를 그리려면> 새를 그리려면 ― 엘자 앙리께즈에게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간단한 것을 뭔가 예쁜 것을 뭔가 유용한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 놓을 것 아무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한 것 새가 날아올 때는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 2020.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