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글 목록 (3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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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330

파블로 네루다 <산보> 산보 때때로 사람 되기가 힘들다는 걸 느낀다. 때때로 양복점이나 영화관에 들어가 풀죽은 자신을 발견한다. 솜뭉치로 만든 백조처럼 어쩔 수 없이 잿더미와 원시밖에 없는 물속을 헤엄치는. 이발관의 냄새는 날 소리쳐 울게 한다. 내가 바라는 건 돌이나 양털의 휴식, 건물들이니 정원이니, 상점들이니 안경이니, 승강기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때로 나는 내 발이니 손톱이 싫을 때가 있다. 내 머리칼이며 나의 그림자가 지겨울 때가 있다. 때때로 사람 되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건 통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백합꽃 한 송이를 꺾어 공증인 따위를 놀라게 해준다든지 귀로 때려서 수녀 하나쯤 죽여 놓는다든지 하는 거. 그건 아름다울 수도 있다. 가령 파란 칼을 들고 길에 나가 추워 죽을 지경이 될.. 2020. 6. 24.
김기택 <틈>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역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 2020. 6. 24.
김영승 <아름다운 폐인 > 아름다운 폐인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나를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를 그리하여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 ―김영승 【산책】 김영승의 반성 시편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다 알 수 있다. 그의 시가 얼마나 다른가를. 기존의 시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면 그의 시들은 아름다움의 이면을 노래하고 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삶의 진실을 노래한다. 아니, 오히려 추하고 볼썽사납고, 보기 민망한 것들을 꺼내 들고 아름다운 시라고 우기기까지 한다. 에서는 자기 자.. 2020. 6. 23.
옥타비오 빠스 <연인들> 연인들 풀밭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밀감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파도와 파도가 거품을 나누듯이. 해변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레몬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구름과 구름이 거품을 나누듯이 . 땅 밑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말이 없다, 입맞춤이 없다 침묵과 침묵을 나눈다. ―옥타비오 빠스 (멕시코 1914-1998) * 199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산책】 옥타비오 빠스의 시 은 죽은 뒤의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죽은 연인들은 달콤한 과일을 한쪽씩 나누며 입술을 맞출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를 흐르는 고요한 침묵을 나눌 수 있다. 연인들이 함께 묻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연인들은 지금 이 순간, 불타게 사랑하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꿈꾼다. 내일 .. 2020. 6. 23.
한강 <피 흐르는 눈 4> 피 흐르는 눈 4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갖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한강 【산책】 고요히 시를 다시 읽어보자.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이런 적이 있는가. 있다. 무수히 많다. 세상이 등을 돌리고 앉은 느낌. 불러도 불러도 그 어디에서도 대꾸 한 마디 없는.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 구원자도 없고, 구원의 .. 2020. 6. 22.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매장(埋葬)> 매장(埋葬) 나는 무덤자리를 찾고 있다. 어디가 더 밝은지 그대는 아는가? 들판은 너무 춥다. 바닷가 돌더미는 스산하고. 그녀는 정적에 길들었는데 지금은 태양빛을 좋아한다. 영원한 우리의 집을 짓듯이, 나는 그녀를 위해 암자를 지으리. 창문들 사이 조그만 문이 날 테고, 우리는 방안에 조그마한 램프불 피우리, 마치 어두운 가슴이 진홍빛 불빛으로 타오르듯이. 병든 그녀는, 다른 무엇, 하늘나라에 대하여 헛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한 수도승이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네 : “천국은 당신들 죄인들을 위한 곳이 아니야.” 그러자, 고통으로 창백해진 그녀가 이렇게 속삭였네 : “나 그대와 함께 가겠어요.” 지금 여기에 우리 홀로 자유로워라, 발밑엔 파아란 파도가 밀려오고.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러시아 188.. 2020. 6. 22.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 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 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 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 2020. 6. 21.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알 수 없는 경계> 알 수 없는 경계 ―엔H. 베B. 엔H에게 사람들의 친근함 속에는 알 수 없는 경계가 있느니, 사랑도 정열도 그 경계를 가로지를 수 없는 것― 장엄한 정적 속에서 두 입술이 합쳐지고 가슴이 사랑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여기에선 우정도 무력하고, 넋이 자유롭고 색욕의 느릿한 권태를 모르는 숭고하고 열렬한 행복의 나날에도, 여기에선 무력하다. 이 경계에 돌진하는 이들은 미쳐가고, 여기에 도달한 이들은 번민으로 휩싸이느니…… 이제 그대 알았을 테지요, 왜 내 가슴이 그대의 두 손 밑에서 두근거리지 않는가를. ―안나 안드레예브나 마흐마또바 (러시아 1889-1966) 【산책】 사람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지도 모른다. 강의 저편과 이편이 하나의 강물로 흐르고 있지만 결코 맞닿지 않는 것처럼. 강을.. 2020. 6. 21.
옥타비오 빠스 <휴식> 휴식 ―삐에르 레베디를 생각하며 새 몇 마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검은 생각 하나. 나무들이 수런댄다. 기차소리, 자동차소리. 이 순간은 오는 걸까 가는 걸까? 태양의 침묵은 웃음과 신음소리를 지나 돌들 사이 돌이 돌의 절규를 터뜨릴 때까지 깊이 창을 꽂는다. 태양심장, 맥박이 뛰는 돌, 과일로 익어가는 피가 도는 돌 :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옥타비오 빠스 (멕시코 1914-1998) * 199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산책】 검은 생각. 나쁜 생각? 어두운 생각? 새들이 나무 사이를 들고 날 때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짙은 나무 그늘 사이로 태양이 비취면 그 빛의 끝자리에 돌이 있다. 돌은 빛을 받아 뜨거워지고 급기야 터져 버리고 만다. 돌은 빛을 품고 .. 2020.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