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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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김기택 <틈>

by 브린니 2020. 6. 24.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역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김기택

 

 

【산책】

틈, 균열, 금, 찢김, 간격, 이런 단어들은 그리 좋은 인상을 풍기지 못한다.

너와 나 사이에 틈이 생겼어.

벽에 균열이 생겼어.

너와 나 사이엔 신뢰가 금이 갔어.

등등.

 

틈이 벌어진 상황에 대해 좋은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건물의 벽에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이 생기다니.

곧 이 건물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틈은 튼튼한 벽에 균열을 내고 거기에 숨 쉴 공간을 만든다.

좀 더 숨 쉴 공간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숨 쉴 틈은 허공이 된다.

튼튼한 것들 사이에 허공을 만드는 힘, 틈을 내는 것, 그래서 그 튼튼한 것들 자체를 무너뜨리는 힘!

이런 틈을 만드는 것이 어디 건물이나 집, 벽 같은 것뿐이랴.

 

당신의 마음속에 허공이 들어 있다면?

마음이 뻥 뚫린 느낌을 어떻게 메울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그저 작은 틈이 아주 살짝 생겼나 싶었는데 어느 새 큰 허공으로 자리 잡았을 때

그것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틈에게 틈을 주어선 안 된다.

그럼 그 틈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김기택의 시 <틈>는 물리학적인 틈을 노래하고 있다.

 

틈은 아무것도 아닌 가냘픈 힘이지만 이것이 수십 년에 걸쳐, 단단한 것들 속에 숨어서, 커다란 허공을 만들어 낸다. 그 가냘픈 힘이 튼튼한 것들을 무너뜨린다.

 

힘없는 민초들의 수십 년 간의 보이지 않는 저항, 즉 허리를 펴는 노력이 허공을 만든다.

허공이라고 해봐야 힘이 없긴 마찬가지인데 그 허공이 그토록 단단해 보이는 권력이나 제도나 법을 무너뜨린다.

 

아무튼 이 시는 아무것도 아닌 허공(허공이야 말로 물리학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 아닌가)이 뭔가 있어보이는, 그리고 실제로도 단단하게 서 있는 건물이나 집, 댐 등을 무너뜨린다는 역설을 노래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실체가 없는 것이 오히려 거대한 실체를 무너뜨릴 때, 얼마나 짜릿한 쾌감을 느낄 것인가.

하지만 그 틈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들어오면 큰일이다.

 

아무튼 틈만 나면 틈이 생기지 않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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